(25)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
(25)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
  • 조신호 기자
  • 승인 2019.08.05 08: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pixabay
pixabay

 

1950년대 중반, 경상도 농촌 마을에서 서울말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라디오가 있는 집은 특별한 경우였다. 어쩌다가 서울말 하는 사람이 마을에 오면,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모여 들어 생소한 억양과 빠른 속도를 신기하게 여기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열심히 해독(解讀)하기 바빴다. 서울에서만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 중에 경상도 사투리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억양에 익숙하지 못하고 가끔 생소한 단어가 나오기 때문이다. 언어는 삶의 배경을 비추어주는 스크린 역할을 해 준다.

요즈음 TV를 보면 주로 젊은 층에서 과도한 존칭어를 사용하고 있다. 커피를 들고 와서, ‘아메리카노가 나오셨습니다!’라고 한다. 어색하다. 변형생성문법에 의하면, 선택제한(selectional restriction) 어법(語法)을 어긴 비문(非文)이다. 사물 주어 ‘아메리카노’에 사람에게 사용하는 ‘나오셨습니다’ 라는 동사가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노가 나왔습니다!’라고 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주인과 종업원 사이의 심리적 압박감이 원인이다. 손님을 최대한 잘 모셔야 한다는 주인의 엄명(嚴命)과 고단한 한국 사회의 시대상도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마트의 점원도 물건 값을 ‘5000원이십니다!’ 라는 한다.

TV에서 자주 목격하는 말이 또 있다. 어떤 리포터가 당사자의 말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이다. 현장에서 녹화된 내용에, ‘○○○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라고 표현이 자주 나온다. 그 내용에 나오는 ○○○이라는 사람은 직계 존속도, 존칭이 합당한 분도 아니다. 그냥 길에서 만난 사람인 경우도 있다. 그냥 ‘○○○가 ∼ 라고 말했습니다.’ 라고 해도 충분한 경우에 극존칭을 사용하는 어색함이다. 이렇게 극존칭을 사용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오늘날 한국의 사회적인 배경에서 오는 피해 의식 또는 그런 강박감 때문일 것이다.

광장의 촛불로 정권이 교체된 후, 오늘날 한국사회는 첨예한 대결이 이어지고 있다. 통합 상생의 길로 가야할 국회의 치열한 싸움, 난장판 청문회, 자유와 진실의 잣대가 되어야 법조계의 미묘한 지향성, 불안정한 경제 상황, 학계와 지식인들의 무기력, 등이 혼재하면서 국민들의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 선량한 시민들도 갑자기 어떤 추궁이나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그런 심리적 부담을 안고 살아간다.

일종의 사회적 ‘피해 강박증’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말 한 마디라도 조심해야 한다.’ 혹시 모르니까, 무조건 극존칭으로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는 소심증 같은 심리작용이 언어로 나타나고 있다. 안심하고 살아가려면 ‘약간의 비굴함도 편리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심리적 반응인지 모른다. 누가 그렇게 지시한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무의식적으로 형성한 심리 상황이 언어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이 아니라, 커피나 마트의 상품 같은 사물에게 비합리적인 존중을 표한다. 젊은이들이 겪는 시대의 아픔이다. 일자리가 불안한 젊은이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앞선다.

필자가 「말과 글」을 좌표로 삼아서 우리들의 삶을 지속적으로 되짚어 보는 까닭은 잠시 멈추어 서서 얼룩진 우리들의 삶을 좀 더 생각해 보는데 있다. 우리가 날마다 세수하고 목욕하듯이, 시시각각 허물어지는 현실을 성찰하는 기회가 필요하다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말과 글을 통해서 동시대인들의 ‘현존재’(Dasein; 변질된 자기)를 점진적으로 포월(包越)하여 청명한 ‘실존’(Existenz; 본래적 자기)으로 회복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하는데 있다.

칼 야스퍼스에 의하면, 우리의 ‘현존재’는 좌절과 실패, 이별과 절망, 질병과 죽음 같은 한계상황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모두가 좌절하거나 난파당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 가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달라진다. 1597년 명량해전에 임했던 이순신 장군이 그 본보기였다. 13대 133척은 싸움은 분명 엄청난 한계상황이었으나, 그 분은 좌절하지 않고 그 상황을 초월하여 실존(實存)규명(糾明)의 정신차원에서 필사즉생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대승리를 거두었다.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은 여러 가지 한계상황에 직면해 있다. ‘본래의 내 자신을 비추는 실존 규명’을 이룩하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삶의 한계를 넘어서도록 포월(包越)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늘 사용하는 말이 중요하다. 흐트러진 말을 수습하여 ‘올바른 말’, ‘진실 된 말’, ‘오늘을 밝혀서 미래로 나아가는 말’이 그 출발점이 될 것이며, 추진력이 될 것이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의 말씀(logos)으로 시작했고, 부처님의 깨달은 말씀이 보존된 경전(經傳)으로 본래의 자기를 바라볼 수 있는 견성(見性)을 가르쳐왔다. 말을 살려서 삶을 일으켜야 한다.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