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옥산서원①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옥산서원①
  • 이원선 기자
  • 승인 2019.07.29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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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4년 경상도 관찰사 김계휘의 제청에 의해 옥산서원이란 이름을 하사받고 사액서원이 되었다.
무잠계무회재(無潛溪無悔齋)즉'잠계가 없었다면 회재도 없다.'라는 말이 있다.
몽중지간 목이 말라 눈을 뜬 회재는 머리맡에 앉은 여인을 보고 귀신인 듯 깜짝 놀랐다.
옥산서원 전경. 이원선 기자
옥산서원 전경. 이원선 기자

경주시 안강읍에 있는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이 별세한 20년 후인 1572(선조 5)경주부윤 이제민이 사림의 뜻을 모아 세운 서원이다. 영남지방 4대 서원답게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폐철되지 않은 47개의 사원 중 하나이며 1574년 경상도 관찰사 김계휘의 제청에 의해 옥산서원이란 이름을 하사받고 사액서원이 되었다.

지리적 위치로는 사산(화개산, 자옥산, 무학산, 도덕산)과 오대(세심대, 관어대, 탁영대, 징심대, 영귀대)에 둘러싸인 길지에 자리하고 있다. 옥산서원이란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썼으며 뒤편 작은 글씨의 옥산서원이란 현판은 토정 이지함의 조카인 아계 이산해가 썼다 전하고 있다. 회재 이언적을 기리는 비각의 비문 역시 고봉 기대승이 짓고 아계 이산해가 썼다고 한다. 그 나머지인 대부분의 현판(역락문, 무변루, 구인당)은 한호 한석봉의 글씨라고 한다. 회재 이언적은 퇴계의 정신적 지주이며 그를 기리는 옥산서원은 196738일 사적 제15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또한 201976일 도동서원 등 총 9개의 서원에 포함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를 확정하는 선포가 있었다.

퇴계 이황(1501~1770)은 조선 성리학의 최고봉이자 조선 성리학을 세계적 철학의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공자나 주자처럼 이자(李子)로 불리던 퇴계는 타고난 자질에다 깊은 사색과 연구로 스승 없이 학문을 대성한 위인이다. 이런 퇴계가 회재 이언적을 각별히 존숭하여, 회재의 학설은 퇴계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회재는 퇴계가 각별히 존중하였기에 그 학문이 빛을 발하고 명성도 높아질 수 있었다. 퇴계와 회재의 이런 관계는 서자인 잠계 이전인의 효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잠계는 그의 부친이 유배지인 평안도 강계에서 별세하자 극심한 고난을 겪으면서 직접 그 시신을 고향인 경주까지 운구하여 장례를 치른 일화는 유명하다. 잠계는 효심이 각별함은 물론, 퇴계를 비롯한 선비들을 찾아 부친의 학문과 사상을 선양하는데 평생을 바쳤다. 퇴계가 회재의 행장(行壯)을 쓴 것도 그 덕분이다. 회재 이언적이 동방 오현(퇴계 이황,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한훤당 김굉필)으로 추앙 받을 수 있음도 효성이 지극한 아들, 잠계 이전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잠계무회재(無潛溪無晦齋)’, 즉 ‘잠계가 없었으면 회재도 없다’는 말이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여름 옥산서원. 이원선 기자
여름 옥산서원. 이원선 기자

야사에 따르면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은 정실부인에게서는 자식을 보지 못한다. 그렇다고 자식이 영 없는 것은 아니었다. 소실이나 첩 등을 들여서 자식을 보았다면 이처럼 극적이거나 감동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강하게 당기는 것이 핏줄인 모양이다. 젊은 시절 주위의 만류를 뿌리친 스스로가 원망스러운 것은 그 어디에도 아버지라 불러줄 자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라 불러주고 또 아들이라 부를 수 있는 13살의 소년이 찾아든 것이다. 노재상은 솜털이 보송보송 앳된 얼굴을 자세히 바라다본 후 양팔로 어깨와 허리를 감싸 안아 옥랑아~’부르곤 목이 멘다.

그는 30세의 나이에 대사간(大司諫)의 벼슬에 있으며 문장과 학식이 조정(朝廷)에 자자했다. 명성이 높아갈수록 그만큼 적도 늘어갔다. 당시의 실세로는 김안로((金安老),호는 희락당(希樂堂)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였다. 벼슬길에 나선 자, 출세를 원하는 자의 대부분 그에게 줄을 대고 있었지만 회재만은 그를 소인배로 취급하여 어울리지 않았다. 당시의 벼슬살이는 동지가 아니면 적으로 흑백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었다. 결국 미운털이 박힌 회재는 파직이란 절차를 거쳐 고향인 경주로 낙향 길에 올랐다.

그로부터 15년 동안 낮에는 채전을 가꾸고 밤에는 호롱 불 아래서 책을 읽는 고절독행(孤節獨行)의 세월을 보낸다. 그렇다고 옥석이 흙에 묻힌들 그 빛조차 잃을까? 보석이 그 고유의 빛을 간직하듯 농투성이의 생활이지만 회재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만 간다. 이는 그동안 뭇 선비들이 김안로를 대인이라 칭했지만 본심을 드러낸 그의 행동이 안하무인 도를 넘자, 회재의 안목에 경의를 드러낸 때문이다.

옥산서원 역락문. 이원선 기자
옥산서원 역락문. 이원선 기자

그때 경주의 문, 무인들은 회재의 조정복귀를 점쳤으며 이대로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한 그들은 어떻게든 그를 불러내려 애를 쓰게 되었다. 이에 가장 앞장선 이가 무인이며 친구인 수사(水使조윤손(曺閏孫)이었다.

그들의 집요한 요청에 처음 회취(會聚)가 열린 곳은 포석정 부근이었고 이후 자주 그런 회취가 마련되었다. 그때마다 윤손은 회재 옆에 묘령의 여인을 앉혔다.

그때 회재가 만난 여인은 근자 기안(妓案)에 적을 올린 경란(瓊蘭)이란 여인으로 남편을 잃은 과부였다. 조선시대는 남존여비가 강했다. 자식이 없는 여인이 남편을 일찍 여의면 소박을 당하기가 일쑤로 출가외인인 까닭에 친정으로 가기 도힘들다. 그런 이유로 경란은 호구지책으로 기적에 이름을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의 나이 이미 30줄에 접어들자 술상머리에서의 퇴짜가 다반사, 따라서 설거지 등 허드렛일 중에 손님이 찾으면 마지못해 나가는 형편으로 기생으로 치자면 퇴물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인물로 치자면 가름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반듯한 것이 잘 빚은 이조백자를 닮았다. 하지만 애교는 젬병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 둘의 만남은 늘 뜨뜻미지근하기만 하다. 약이 바짝 오른 윤손이 일부함원(一夫含怨: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월비상(五月飛霜:오원에도 서리가 내린다네)’라고 엄포를 주지만 소용이 없었다. 손이라도 잡고 어깨라도 다정하게 감싸안으면 오죽 좋으련만 내외를 하며 술잔에 예를 갖추어 주고받을 뿐이다. 그렇다고 영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문원공 회재 이언적 신도비각 및 신도비
문원공 회재 이언적 신도비각 및 신도비. 이원선 기자

그런 둘의 태도를 바라보는 윤손은 애가 탔다. 유방이 설가촌에서 과부인 척부인을 만나 사랑을 불태우는 그런 만남은 아닐지라도 이거는 아니다 싶었다. 어떻게 일이 잘되어 둘 사이에 아이라도 생기면 금상첨화다 싶어 고대하지만 무심한 세월은 봄과 여름을 거슬러 가을인가 싶더니 불식간 겨울로 접어든다. 그동안 음으로 양으로 일을 주선한 지인들과 윤손이 생각건대 이 일은 애당초 글렀다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그날은 눈이 내렸고 회재와 윤손은 불국사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점점 굵어지는 눈발, 급기야 둘은 인근 주막집을 찾아 들었다. 미리 기별을 받았는지 안내된 봉놋방은 훈훈한 공기와 함께 아랫목이 따뜻하다. 이어 들어온 주안상조차 첩첩산중에서는 볼 수 없는 육류에 나물반찬이 곁들여 정갈하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청주는 금세 데운 듯 진한 향기를 품어 마른입에 은근한 침이 고이고 ~ ~ 한잔 들게!”권하는 한잔 술이 목구멍을 넘어 뱃구레에 이르자 추위에 굳었던 몸과 마음이 봄눈 녹듯 녹진녹진 해진다. 연거푸 몇 순배의 술잔이 돌자 윤손이 남양융중(南陽隆中)의 눈 덮인 죽옥(竹屋))속에서 찻잔을 기울이는 제갈공명(諸葛孔明)과 그의 친구들도 이런 기분일까?”또 한잔 권한다. 방안의 공기가 한층 훈훈하여 봉창을 열고 밖을 보니 흰 눈이 펄펄 내리는 중에 만수장림(萬樹長林)이 눈꽃이요 사방은 희뿌연 안개다.

어느덧 밤은 깊어 월백설백천지백, 산심야심객수심(月白雪白天地白, 山深夜深客愁深:달 희고 눈 희고 천지도 희고 산 깊고 밤 깊고 나그네 근심도 깊다.”고시조 한 자락이 읊어지는 삼경이다.

몽중지간 목이 말라 눈을 뜬 회재는 머리맡에 앉은 여인을 보고 귀신인 듯 깜짝 놀랐다

역락문에서 일직선으로 보이는 정료대. 이원선 기자
역락문에서 일직선으로 보이는 정료대. 이원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