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기와 전통놀이…봉사의 삶' 곽종상 씨
'자치기와 전통놀이…봉사의 삶' 곽종상 씨
  • 조동래 기자
  • 승인 2019.07.23 14:15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문으로 공부하고 봉사는 생활의 한 부분으로 여기는 삶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문 당선
제1회 자치기 대회를 개최하며 전통놀이 보급에 앞장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며 환한 표정을 짓는 곽종상 씨          사진    조동래  기자
곽종상 씨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며 환한 표정을 짓고 있다.    조동래 기자

 

지난 6월 대구 남구 구민운동장에서는 우리 전통놀이인 자치기 대회가 열렸다. 어린 시절 추억을 간직한 어르신들이 한데 모여 자치기 놀이를 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이 대회는 자치단체나 시민단체가 나서 주최한 것이 아니었다. 자치기를 사랑하는 한 개인이 사비를 털어 마련한 대회였다. 참가자들에게 줄 상금을 손수 마련하고, 손글씨로 만든 포스터를 들고 노인복지관 등을 찾아 홍보하며 '선수'들을 모았다.  잊혀가는 우리 전통놀이를 지키려는 마음 하나만을 가지고.  자치기를 사랑하는 열정과 동심,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80대 소년' 곽종상(85) 어르신을 만났다.  그에게서 살아온 이야기, 우리 세시풍속의 어떤 면이 그를 매료시켰는지 들었다.

-본인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나이 먹은 사람이 소개랄 게 있나요, 저는1934년 10월, 제법 큰 마을의 구장을 지내기는 했지만 소작 농사를 지으며 겨우 입에 풀칠만 하는 집안에 늦둥이 외동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공부를 곧잘 하기는 했지만 중학교 진학은 할 수 없었고, 자잘한 농사일이며 땔감나무 베기 등으로 집안일을 돕다 아버지 승낙을 얻어 19세에 도시로 나왔습니다. 그때부터 고생 아닌 고생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하시는 일은 무엇인지요.

▶저는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제 밑천이라고는 아버지한테 배운 명심보감과 붓글씨뿐입니다. 게다가 왜소한 체격을 가지고 일자리를 구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간판집, 거울점, 제본소 등을 전전하다가 당시 인기 있는 신문사의 대구지사에 들어간 것이 거의 첫 직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먼지가 많은 열악한 작업환경 때문에 결핵에 걸리는 바람에 오래 다니지는 못했지만 거기에서의 퇴직금을 바탕으로 필경사가 된 뒤에 전셋집도 얻고, 그 일로 자식 넷을 교육시키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신문으로 공부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어떤 사연이 있습니까.

▶보시다시피 아직도 저는 체구가 건장치는 못합니다. 어렸을 때는 더 왜소했고, 자연스레 뛰노는 것 보다는 앉아서 글 쓰고 읽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상급학교에 진학을 할 수 없었고, 초등학교 4학년 때 글짓기 시간에 제가 쓴 글을 선생님이 칭찬해 주시던 좋은 기억을 가지고, 신문사에 근무할 당시 사설이나 평론 등을 모조리 읽으며 그것으로 공부를 대신했습니다.

당시 신문은 한자가 대부분이었지만 아버지한테 명심보감을 배운 덕분에 막힘없이 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읽는 것에 그치기 않고 지방지뿐만 아니라 중앙지에 투고(投稿)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 고등학교 1학년 국어교과서에 음력과 세시풍속의 내용을 혼돈한 것을 지적하여 잘못된 내용을 고친 일은 가장 보람을 느끼게 했습니다.

-신문과 관련된 또 다른 추억은 없으신가요?

▶저의 아이 중 맏이가 군대에서 제대할 때 즈음, 여섯 식구의 이야기가 담긴 가족신문을 만들었습니다. ‘들국화’라는 제목을 붙여 1986년 9월 첫 호가 나왔습니다.

한쪽에 금언이나 좋은 글귀를 넣고, 또 한쪽에는 가훈과 집 주소, 전화번호를 넣었습니다. 각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필로 썼는데, 그림을 잘 그리는 맏이는 네 칸짜리 만화도 그려넣었습니다. 저는 ‘호롱불’이라는 작은 코너를 맡아 지금은 사라진 옛날의 생활모습이나 풍습, 예절 등에 관해 기록했습니다. 문법이 서툴렀던 아내의 글을 수정해서 올렸던 게 지금 돌이켜보면 조금 아쉽습니다.

아이들이 결혼을 하고 며느리, 손자도 함께 가족신문에 참여하면서 가족 간의 마음을 읽고, 서로를 이해해가는 훌륭한 소통의 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으로 서울로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면서, 이메일 등 다른 통신수단이 발달하다보니 16년 동안 발행해오던 가족신문은 아쉽게도 더 만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두 아기의 엄마가 된 손녀가 가족신문을 다시 만들자는 건의에 모든 가족이 찬성하여 곧 다시 재발행을 앞두고 있습니다. 참으로 기쁘고 설렙니다.

지난 6월 자치기 대회를 주최하며 참가자들에게 대회 규칙에 대해 설명하는 곽종상 씨              사진  조동래 기자
지난 6월 자치기 대회를 주최한 곽종상 씨(오른쪽)가 참가자들에게 대회 규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조동래 기자

 

- 지난 6월, 어린 시절 즐겨하던 자치기놀이 대회를 주최하셨는데요, 어떤 계기가 있으셨습니까?

▶요즘 시니어들을 위한 여가시간활용 프로그램들은 노래 부르기, 요가, 체조 등 매우 다양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실내에서 이루어지고, 야외에서 할 수 있는 활동으로는 게이트볼이 대중적입니다. 하지만 이건 우리 전통놀이가 아니잖아요.

우리가 어렸을 때 친구들과 겨울철 논두렁에서, 골목골목에서 놀았던 ‘자치기’를 통해 옛날 추억들도 떠올리고, 또 젊은이들에게 우리 전통문화를 알리기도 하자는 취지에서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혼자서 준비하고 진행하기에 어려움도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많은 분들께서 관심을 가지고 참가해주신 덕분에 모처럼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잘 마무리했습니다.

- 자치기대회가 회를 거듭하며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저희도 함께 돕겠습니다. 그 외에 요즈음은 어떤 일에 보람을 느끼시는지요?

▶매일 아침마다 앞산으로 산책을 합니다. 향긋한 소나무 향기와 아카시 꽃향기를 마시며 산새들 노래도 듣고, 다람쥐 재롱도 봅니다. 그 덕분인지 아흔이 가까운 나아지만 아직 건강에 큰 이상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좋은 기분을 언짢게 하는 게 한 가지 있었습니다. 바로 등산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였습니다. 과자봉지, 음료수 캔, 담배꽁초, 휴지 등.

눈살을 찌푸리며 지나다니다가 ‘아니다, 그러면 저걸 내가 줍자’ 마음먹고, 쓰레기를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쑥스럽기도 하고, 잘난척한다 핀잔 들을까 머뭇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나가던 한 분이 쓰레기를 줍는 저에게 “수고하십니다”라고 인사를 건네주었고, 또 다른 분은 “좋은 일 하십니다”라고 기분 좋은 말씀을 해 주었습니다. 그 말씀들에 용기도 나고, 뿌듯함도 느꼈습니다. 이제는 저와 함께 쓰레기를 줍는 사람도 많이 늘었고, 쓰레기도 훨씬 많이 줄었습니다. 점점 깨끗해지는 이 길은 ‘앞산자락길’과 연결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게 되었고, 마치 저는 멋진 우리집 정원을 얻은 것처럼 오가는 등산객들이 반갑습니다.

- 마지막으로 지면을 통해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남겨 주십시오.

▶제 아내는 장애인을 돕는 봉사활동을 오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 영향을 받아 저도 한때 시니어클럽에 들어가 시각장애인에게 책 읽어주기, 거동한 불편한 노인들을 휠체어에 태워 나들이하기, 주민자치센터에서의 서예지도, 가훈 써주기 등 나름의 봉사를 한다고 했는데요, 이 ‘쓰레기줍기’만큼 보람을 느끼는 일은 없었던 것 같아요. 산책하면서 건강도 지켜주고 또 기쁨도 함께 느끼게 해 주는 이 일을 앞으로도 계속하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제 아내에게 한 마디 하고 싶습니다. 참 강했던 사람인데 이제는 저보다 더 약해진 그 사람의 손을 잡고 산책을 하던 어느 날, 담배꽁초를 줍는 저에게 “당신, 이 길에서 하는 거, 나한테는 그 반의반도 못하는 거 알아요?” 무심코 툭 던지는 한마디에 그 때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겸연쩍게 웃기만 했는데요.

“여보, 미안하오, 그리고 참 고맙소, 우리 건강하게 오래도록 같이 손잡고 삽시다.”

평소 건전한 노인문화를 이끌어내려고 연구하고 노력하는 곽종상 씨에게 큰 박수를 보내며, 우리 사회의 모범적인 어르신으로 항상 건강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