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민주화와 민주주의
(18) 민주화와 민주주의
  • 조신호 기자
  • 승인 2019.06.17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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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점은 민주주의라는 ‘제도(制度)’가 아니라, 그것을 만들고 운영하는 사람들의 '마음(情神), 즉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중’ 정신이다.

 

b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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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태어난 영국의 작가이자 언론인,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ur Blair; 1903∼1950)는 조지 오웰(George Orwell)이라는 필명으로 1945년에 소련 공산주의를 풍자한 소설 『동물농장, Animal Farm』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존스 농장에 살던 동물들이 가혹한 생활에 못 이겨 주인을 몰아내고 직접 농장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혁명을 주도했던 지도층 동물들의 초심이 흐려지면서 점점 그전보다 못한 농장으로 전락해 간다는 이야기였다. 평론가들이 언급하지 않지만, 이 소설의 후반부를 눈여겨보면, ‘공산주의’와 함께 ‘민주주의’에 대한 풍자도 포함되어 있다.

민주주의는 그리스의 폴리스(도시국가)에서 시작되었다. 민주주의(demo-cracy)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 데모스(demos; 민중, 시민)와 크라티아(Kratia; 권력, 지배)의 합성어인 데모크라티아(democratia)에서 유래했다. 그때의 민주주의는 각 폴리스에 한정된 시민에게만 참정권을 인정했을 뿐이었다. 여성이나 노예는 시민으로 인정되지 못하였으며, 그리스인이라도 다른 폴리스에서 이주한 사람에게는 시민권이 주어지는 일이 드물었다.

이와 같이 ‘민주주의’는 처음부터 제한적이고 불평등한 시민권을 행사하도록 만들어진 통치와 지배를 위한 정치적인 장치였다. 오늘날 서구에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6가지 필수 요건을 두고 있다. ①보통선거를 통한 1인 1표의 대표 선출권, ②2개 이상의 정당들이 선거에서 정치 강령과 후보들을 내세우는 제도, ③모든 국민이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가지면 법적 절차 없이 체포, 구금을 당하지 않는 권리, ④정부의 시책은 국민의 복리증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제도, ⑤국가는 효율적인 지도력과 책임 있는 비판을 보장하여야 하므로, 정부 관리들은 늘 의회와 언론에서 반대의견을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모든 시민은 독립된 사법제도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제도, ⑥정권교체는 평화적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정치 체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필수 요건이 국민을 위한 것인지, 통치자 집단을 위한 것인지 불분명하다.

‘민주주의’라는 ‘①demo(국민)+②cracy(권력,지배)’라는 어원(語源)상으로 보면, ①과 ② 두 가지 요소의 비중이 어디 있는지 명확하지 않다. 단어의 의미 자체가 지니는 임의성 때문이다. 의미의 ‘임의성(불명확성)’이 언어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조지 오웰은 이를 염두에 두고 소설을 썼을 것이다.

우리 인간이 사용하는 말이나 문장에는 불확실성, 즉 애매호모성(ambiguity)이 항상 존재한다.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지닌 임의성은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명확히 드러난다. 여기서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국민의 뜻이 아니라, 위정자의 ‘지배와 통치’를 의미한다. 민주주의가 발달된 미국도 대통령의 결재에 의해서 시민들의 삶이 좌우된다. 그리고 국민투표로 결정된 영국의 브렉시트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측하기 어렵다.

소설 『동물농장』이 출간된 직후,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이념 충돌이 시작되었다. 2년 후 결국 6.25, 한국전쟁으로 민족의 비극을 가져왔다. 한국의 근대사 약 70년 동안, ‘민주화’ 또는 ‘민주주의’가 줄곧 사회적 화두가 되었다. 민주화 과정에서 피를 흘렸고, 광장의 촛불로 정권이 교체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산업화와 경제 발전의 과정을 봉인하는 거대한 장막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아직도 폭력이 난무하는 걸 보면,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인지, 그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시대부터 demo(국민)가 중심인지, cracy(권력, 지배)가 우선인지 불명확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라는 이념에서 중요한 것은 ‘제도(制度)’가 아니라, 그것을 만들고 운영하는 사람들의 마음(情神)이다. 즉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중’ 정신이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민주주의는 너를 나처럼 소중하게 존중하는데서 출발한다.”라고 강조해 왔다. 이를 실천하지 못하면, 전술한 6가지 필수 요건은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 배려와 존중 정신이 바로 설 때, ‘막말과 저주’가 사라지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