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9)
녹슨 철모 (9)
  • 시니어每日
  • 승인 2019.05.27 09: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굴토끼 사육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놈들은 태원의 계산대로 저희끼리 스스로 교미를 하여 새끼를 불려 나갔다. 새로 태어난 새끼는 며칠 동안 굴에 숨어 지내다가 밖으로 나온다. 첫선 보이기 전에 구멍에서 고개를 내밀고 붉은 눈으로 좌우를 살피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정말 귀여웠다. 드디어 어느 토요일 한 마리를 잡았다. 양념이 부족한 탓인지 솜씨 탓인지 고기는 별맛이 없었다. 하지만 결국 첫 토끼를 먹게 되었다는 사실에 의무실 위생병들은 흥분하였고 딴 부처의 사병들도 놀라운 눈으로 그 일을 지켜보았다.

우 중위는 매일 새벽 헌병 대장 관사로 갔다.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에서 일주일간 헌병 대장의 안압을 새벽과 아침 식후로 두 번 측정하여 오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전방서는 헌병 병장만 만나도 주눅이 들던 그였다. 새벽에 헌병 대장을 만나 안압을 재고 단둘이 겸상하여 아침을 먹고 다시 안압을 잰 후 같이 부대로 출근한다는 일이 처음에는 무척 서먹하고 힘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날이 계속되자 나중에는 그런대로 적응되었고 나중에는 신이 났다. 아침 출근할 때 헌병대 일호 차는 일단 헌병대에 들러 대장은 내리고 우 중위는 다시 헌병대 맞은편에 있는 사령부 의무실로 가서 내린다. 큰 부대는 장군들과 특수 보직 장교 외 모든 사령부 장병들은 차량이든 보행이든 부대 뒷문으로 다니게 되어 있다. 하지만 헌병 대장 차를 타면 우 중위를 싣고 부대 정문을 바로 통과한다. 뒷문으로 출근할 때는 농담이나 하고 경례도 잘 하지 않던 헌병들이 그들의 대장 차를 타고 정문으로 들어가면 차 속에 누가 타고 있는지 알면서도 일제히 "멸공!” 하고 요란한 거수경례를 붙이는 것이었다. 헌병들의 경례는 그들 대장 차에게 하는 것 같았다.

 

어느 날 밤 보안대장 관사로 태원이 왕진을 갔다. 심한 감기몸살로 옴짝달싹할 수 없다고 했다. 아무리 감기가 심해도 그 무섭던 대령이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우 중위는 그의 약한 모습에 그 전에 당했던 수모가 다 잊혀지고 최선을 다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일단 수액을 주사하고 자리를 뜨려고 하였다.

"어이, 실장 당신은 고향이 어디야?"

환자가 갑자기 물었다.

"대구입니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나는 안동이야.”

보안대장은 친근하게 자기 고향을 밝히고 계속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때 ‘옷 사건' 도 나왔다.

“사실은 말이야. 그날 당신 첫 인상이 괜찮더라고, 성실해 보이고, 육군규정대로 복장을 갖춘 모습과 또 여느 군의관과는 달리 빤질거리지 않고 서민적인 분위기가 좋았어. 그래서 내가 당신을 일부러 떠보느라 야단쳐 본 거야. 우리 부대 첩보에도 당신의 평이 좋아 볼일 보러 사령부 갔던 김에 일부러 가본 거야.”

변명인지 진심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 이야기를 하였다. 하여간 기분 나쁜 말은 아니었다.

‘대장님은 저의 대학 시절 경력도 아시지요?’라고 태원이 물어보려다 참고 말았다.

그날 밤 이후 우 중위는 보안대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들었다. 사람이 옳게만 살면 되는구나 하는 희미한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태원은 야전병원으로 정기 환자 후송 때 자주 따라나섰다. 응급후송이 아닌 때는 대개 의무대 선임하사인 이 상사를 보냈는데 요즘은 실장 자신이 직접 가는 횟수가 잦았다. 유선영 소위의 커다란 눈이 보고 싶었다. 살짝 웃을 때 그 밝은 모습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니 말도 하고 싶었다. 이 상사가 웃으며 슬쩍 떠보듯이 말했다.

“실장님, 병원에 너무 자주 가시는데요.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긴 거 아니에요?"

우 중위는 가슴이 뜨끔하였다. 그녀를 병원 밖에서 만나고 싶었다. 만나서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은 없다. 그저 그녀를 보고 싶다는 생각만 우 중위의 머릿속에 가득하였다. 망설이던 어느 날 '일요일 오전 11시 금촌에 있는 강 다방으로 오세요' 라는 쪽지를 그녀에게 슬쩍 전해주었다. 부대로 돌아오는 우 중위의 가슴 속에는 자신이 뭘 잘못하고 있다는 죄책감과 후회감이 뒤범벅되어 머리 뒤꼭지에서 흐릿하게 녹아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여자를 만나고 싶다’ 그리고 ‘말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그는 이병주와 결혼한 이후 다른 여자에 대한 그런 욕구와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배신적 행위이고 파렴치한 짓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결혼과 동시에 다른 여자들과의 관계는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아내 이병주는 태원과 함께 하숙하던 고등학교 친구의 여동생이었다. 우태원은 대학 때 서울로 유학 오고 그녀는 고등학교 때 서울에 올라왔는데, 그들은 같은 해에 서울로 유학을 온 것이었다. 집안에 여자가 없고 환경상 여자를 전혀 모르고 자라온 우태원은 그녀가 잘 웃고 착하고 예쁘게 생겨 그녀가 찾아오면 굉장히 반가웠다. 하지만 속으로는 자주 자신을 나무라고 질책했다. 아직 저렇게 어린 고등학생에게 호감이 가는 자신이 부도덕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오빠 하숙집 부근에 살던 그녀는 자주 태원의 하숙집을 방문하였다. 셋이 만나면 밥도 같이 먹고 깔깔대며 이야기도 잘 하였지만 친구가 없으면 병주는 오빠의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태원이 그녀에게 불편하게 마루에 앉아 오빠를 기다리지 말고 방안에 들어와서 기다리기를 권했지만 그녀는 말을 듣지 않았다. 이럴 때 태원은 오빠를 만나러 온 것보다 나를 보러 온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다 스스로 부끄러워 고개를 흔들며 이런 생각을 지워 버리기도 하였다. 나중에 그녀의 오빠는 R.O.T.C 훈련을 받고 졸업 뒤 군에 입대하였고 그녀는 대학생이 되었다. 그때부터 태원과 병주는 만날 이유가 없어졌다. 각자의 길로 가야 할 시점이 되었다. 친구가 떠났으니 이제 그들도 그냥 안 만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태원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3년의 만남이 그렇게 쉽게 없었던 것처럼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