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장군의 수염
(14) 장군의 수염
  • 조신호 기자
  • 승인 2019.05.20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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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말이든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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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장군의 수염(1968)’은 석학 이어령이 30대 초반에 쓴 동명 장편소설(1966)을 이성구 감독이 애니메이션을 사용하여 극적 분위기를 일전시키는 등 새로운 시도를 보인 작품이었다. 한국전쟁의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동시대인의 고독과 소외라는 관념적인 주제를 다룬 ‘모더니즘 영화의 대표작’으로 평가되었다.

영화는 사진기자 김철훈(신성일)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노련한 박형사(김승호)가 주변 인물들을 조사하면서 시작된다.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해 철훈의 주변 인물들을 차례로 조사하며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추리가 전개된다. 박형사는 김철훈과 한때 동거했던 댄서 출신 나신혜(윤정희)를 만나게 되고, 그가 ‘고해(告解)놀이’를 비롯한 비현실적인 망집(妄執)의 사나이였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신혜를 통해서 철훈이 『장군의 수염』이라는 소설을 쓰고 있었다는 점도 드러났다. 그 소설 원고를 통해서 철훈은 유년시절부터 특이한 고독감에 사로잡혀 있었고, 획일화된 시대의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아왔음이 파악되었다. 결국 그러한 망상 속에서 소설과 현실을 혼동하다가 자살이라는 비극에 이르렀다. 박형사는 “현실적응 능력이 없는 철훈은 자살할 수밖에 없었다.” 라고 수사를 종결했다.

소설 『장군의 수염』의 ‘수염’은 쿠데타에 성공한 장군이 기르고 있던 콧수염을 전 국민이 따라 하는 획일화된 사회의 모순을 고발하는 문학적인 장치였다. 수염을 기르지 않으면 따돌림과 냉대, 압력을 받는 사회를 비판한 이 영화로 이성구는 대종상, 백상예술대상 백마상에서 감독상을 수상했고, 관객 10만 명 이상 동원으로 흥행에도 성공했으며, ‘한국영화 100선’ 선정되기도 했다.

수염은 남자의 신체적 특징이며, 전통적으로 가부장 사회의 권위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 부각된 ‘장군의 수염’은 정치적인 획일화된 사회에 일어나는 삶의 모순 그 자체였다. 한 개인의 자유의지나 실존적인 선택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인 압력에 의해서 수염을 기르는 현상은 무조건 나를 따르라는 독재자의 폭정을 의미했다.

수염은 무슬림 성직자들에게는 권위이며, 그 사회의 모든 남성들에게 획일적으로 의무화된 관습이다. 저명한 이슬람 지도자 뮈랏 바야랄은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는 신체 부위 중 하나는 턱수염이고 또 하나는 머리카락”이다. “남성과 여성은 비슷한 옷을 입기 때문에 자칫 혼란스러울 수 있으므로 남성이 남성임을 나타내는 턱수염을 기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전통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슬람의 관습도 세월이 흐르면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획일화에 대한 반향이다. 터키에서는 턱수염을 기르는 것이 이슬람 보수주의 성향을 고수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무슬림 여성들이 히잡 착용에서 조금씩 해방되는 것처럼, 남성들의 턱수염이나 콧수염도 세속과 어울리지 않는다, 또는 지나치게 종교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비쳐질 우려가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2014년에는 터키 프로축구 1부 리그의 구단주가 선수들에게 성직자처럼 수염을 기르지 말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턱수염을 기른 채 그라운드에 들어가는 선수에게 벌금을 물리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5년에는 터키 남성들이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활동대원으로 오인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턱수염을 면도하는 남성이 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남성의 수염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슬람 경전인 코란 어디에도 남성이 반드시 체모를 길러야 한다는 내용은 없다고 주장한다.

김일성은 수염을 싫어했다. 1969년 1월경 인민보위성 김창보를 숙청한 후, 당 간부들을 모아 놓고 '수염쟁이들이 평생 나를 괴롭혔다'고 말했다. 이날 김일성은 민족주의자들을 포함해 친러파와 친중파 등 자신의 모든 정적(政敵)을 ‘수염쟁이’에 빗대어 비난했다. 김일성의 수염 혐오와 함께 1인 독재 시대가 시작되었고, 북한에서 남자의 수염이 사라졌다. 수염을 기르는 획일화처럼 수염을 금지하는 획일화도 역시 인간 삶을 억압하는 모순이다.

수염은 개인적인 취향인 동시에 바디 랭귀지(body language), 즉 일종의 비언어적 의사소통(Non-verbal Communication) 도구이다. 언어적이든 비언어적이든 의사소통의 자유롭고 민주적이어야 한다. 요즈음 정치권에서 ‘달창’, ‘한센병’ 등의 단어를 거론하며 논란을 거듭하고 있다. 어떤 말이든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 공자는 ‘ 말을 들어보면 그 나라의 품격을 알 수 있다’ 고 했다.(『禮記-經解26』) 우리 대한민국도 국민들의 말이 아름다운 나라, 아름다운 말로 정신이 건강한 나라가 되기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