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 도시의 여행, 장안(长安)
중국 고대 도시의 여행, 장안(长安)
  • 김한영 기자
  • 승인 2023.11.2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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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이 중국 대륙 시안(西安)에서 수출 생산 전초기지로 활동해 온지 벌써 여러 해가 넘었다. 중국 모(某)집단에서 복제판 삼성 반도체 라인을 깔려다, 대만의 한 기업으로부터 약속된 자금 지원이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한 관계으로 일단 실패로 끝났지만, 최근 다시 작업을 계속 추진 진행 중인 걸로 뉴스화 되고 있다.

옛 도읍지로 유명한 장안(长安),바로 오늘의 시안(西安)이다. 중국에서 “베이징(北京)"보다 진정한 의미에서는 최초의 수도이자, 국제적인 대 도시의 품격을 고루 갖춘 산시성(陕西城) 수도이기도 하고 13개 왕조가 들어섰던 유구한 역사의 전통을 가진 중국 황하유역의 발상지이다. 신석기 문화를 포함한 중화문명의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방면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서한(西汉)수(隋),당(唐)의 수도이기도 했다. 서한 왕조시기에 실크로드의 출발점으로 끝없는 사막과 황무지를 거쳐 개척한 무역으로 오고 간‘캐러밴'들의 교역의 상거래는 많은 유물과 문화의 유산을 남기기도 했다.

중국고대도시 “도시(城市)” 중국 저자 ‘둥첸홍’ 저서에 근거한 묘사된 부분 중에 1500여 년 전에 이토록 큰 규모의 질서 정연한 계획 도시가 출현할 수 있었던 것에 국외 학자들도 큰 충격에 빠진다고 적었다. 그 당시 이미 공기의 순환을 염두에 둔 동풍계획도 반영이 되었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후한 이후 낙양(落阳)이 수도로 천도 되었지만 장안은 여전히 번화함을 유지한다. 조사에 의하면 장안성의 규모는 동서 길이가 9721미터 남북 폭이 8651미터 둘레가 36킬로미터에 이르니 대지 나 면적 규모로 볼 때 고대 중국에서 가장 큰 도시로 세계에서도 이처럼 대비할 수 있는 도시는 없었다. 장안성의 인구는 당시 100만 명 정도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도시 가구수 가 8만호(户)정도 있었는데 가구당 8~`10명 정도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당시의 귀족과 관리들은 노비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니 역사 기록에 근거한 추정이 가능하다.

당나라 ‘장안성(长安城) 안에는 108개 이방이 거주 지역이 있었는데 담장문이 폐쇄적인 엄격히 관리된 이방제(里坊制),(중국의 철기 문화시대부터 내려오는 고대 도시의 기본 도시기획, 기본단위로) 치안과 정치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이방에는 담장과 문이 있었고 정해진 시간에 문을 닫았다. 아침에 북치는 소리로 문을 열었고 해질 무렵에 60번의 북소리로 방 외부에 있던 거주민들은 서둘러 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방 안의 길은 각 집과 연결되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규제된 관리는 거주민들의 생활에 굉장한 불편을 안겨줬다. 이처럼 엄격한 규제는 도시 자체가 경제 발전은 물론, 도시생활에도 도움이 안 되니, 이후 관리가 느슨할 틈을 이용해 자연스럽게 각자 집의 문을 내고 가게도 열 수 있었다고 한다.

당나라 장안성의 도로 시스템은 도로의 기능이 아주 특징적으로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고 성문으로 통하는 주간선도로, 동서 방향으로 세 갈래, 남북 방향으로 세 갈래로 주간선 도로는 성문 밖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폭이 굉장히 컸는데 기록에 의하면 지금의 150미터쯤 된다고 한다. 현대에 들어서서 실측조사를 한 바, 그 폭이 155미터나 되었고, 노면은 양쪽으로 3미터의 배수구와 가로수도 배치됐다.

 

 당나라 시절 정원( 모형테마)광경, 시안의 관광지

웅장함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한 도로 규모는 기세가 대단했지만 당시의 교통수단은 말과 마차 정도였으니 유동 량(量)이 별로 많지 않아 한산 했을 것이다. 거리 풍경은 휑하고 단조로워 도시로서 매력적이지는 못했다. 다만 황제가 출행 할 때 도보군사와 기병부대, 의장대가 수행함으로써 큰 폭의 도로가 필요 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한 규모에 걸맞게 자그마치 군사 20만이 황제의 뒤를 따르고 기이(奇异) 한 것들이 출현함으로써, 당시 당나라에 유학간 일본 승려 ‘엔닌’(793~864):1883년 일본에서 발견된 “일기체식 여행기”의 필사본을 쓴 내용에서 ‘장보고’을 비롯한 신라인들의 활동도 포함한, 기록이 존재한다. 의장대에는 사자를 비롯한 코끼리도 대오를 지켰다고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 당시로서는 대단한 구경거리였음을 짐작케 한다.

“도시계획과 건설학적 측면에서 중국 고대 도시의 뛰어난 기술과 담대한 구상, 훌륭한 문화적 가치를 다채롭게 증명해준 저자 ‘퉁첸훙’의 도시(城市)였다면 또다른 시각으로서는 왕조(王朝)도읍지를 천도하고 천하를 다스리는 정치를 했지만, 결국은 백성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며 대동사회(大东社会) 이루지 못한 중국 왕조의 슬픈 정치역사를 지적하는 부분도 존재한다

백성들의 삶의 질에는 별로 관심도 없었고 도시 중심에서 벗어난 자기들만의 위한 화려한 궁궐을 짓고, 물론 외세 침략에 대비한 전략적 방어망 측면도 있지만 城(성)갖춘 황제들은 온갖 사치를 즐기며 무분별한 전쟁만 일삼은 지배 구조의 문제점을 인문학적으로 본 김학주 저자의 “장안과 낙양 그리고 북경”이란 저서에서는 중국 왕조의 지배자들의 성격과 사상에 따라 판이하게 바뀐 점도 또 다른 관점에서 중국 대륙을 지배한 세력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술한다.

장안을 도읍지로 한 중국 왕조 중에서도 한나라와 당나라는 중국의 전통 문화를 크게 발전시켰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당나라의 ‘당삼채(唐三彩)' 도자기가 대표적이다. 흰색, 갈색, 녹색 3채색으로 유약을 사용한 세가지 빛을 사용한, 대단한 풍격을 가진 도자기이다. 이러한 문화적 유산은 당시에도 많은 해외국가에 전파시키고 도기 문화를 발전케 했다. 장안은 국제적 위상에 걸맞게 차고 넘치는 그 많은 유적과 훌륭한 유물들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을 바꾸는 왕조들의 전쟁에서 약탈되고 불태움에 많이 없어지고 부서지고 소실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