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수필] 100라운드의 권투경기
[기자 수필] 100라운드의 권투경기
  • 이상유 기자
  • 승인 2023.11.1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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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100라운드의 권투경기다.

오늘도 나는, 세상이라는 냉혹한 사각의 링 위에서 승부를 예측할 수 없는 권투경기를 벌이고 있다. 지금 68라운드가 진행 중이다.

한때는 챔피언이 되겠다는 큰 목표를 세우고 거침없이 주먹을 휘두르던 때가 있었다. 오직 주먹 하나로 돈과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쥐겠다며 젊은 패기로 날뛰던 시절이었다. 때로는 상대의 카운터 펀치를 맞고 비틀거리기도 했다. 마우스피스가 튕겨 나가고 눈두덩이 찢어지고 붉은 코피를 쏟기도 했으며 클린치 작전으로 겨우겨우 버티는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KO도 당하지 않고, 퇴장도 당하지 않고, 기권도 하지 않고 지금까지 용케 버텨왔다. 지난날 승리의 기쁨이나 패배의 아픔은 모두 아름다운 추억으로 가슴속에 살아남아 지금껏 나를 지탱하게 해주는 힘이 되었다. 이제 경기는 중반을 넘어 종반전에 접어들었다. 팽팽하던 근육은 물러지고 기력도 떨어져 모든 것이 옛날 같지 않다. 눈도 침침하고, 귀도 잘 들리지 않는다. 한때 주 무기였던 강력한 훅이나 어퍼컷을 치기는 힘들어졌다. 펀치의 세기나 빠르기나 적중률도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게 되어버렸고 가끔 스텝이 엉킬 때도 있다. 나를 아끼는 주변의 사람들은 이제 작은 잽이나 툭 툭 던지면서 체력을 안배하고,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불의(不意)의 KO 펀치나 경계하면서 적당히 라운드를 끌고 가라고 권한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100라운드의 멋진 승부를 위해 어렵게 세상의 링 위에 오른 내가 그래서 되겠는가? 나약한 감상(感想)에 젖어 몸을 사리며, 다시는 오지 못할 소중한 시간을 헛되이 보낼 수는 없다. 판정이 내려질 때까지는 아직도 많은 라운드가 남았다. 종반전으로 갈수록 점점 더 외롭고 힘든 싸움이 될 것은 틀림없다. 예상치도 못했던 강력한 펀치들이 날아들어 한순간에 경기를 끝내 버리려고 할지도 모른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젖 먹던 힘까지 다해 후회 없이 경기를 마무리해야 한다. 경기가 끝나는 순간, 내 몸과 마음의 어느 구석진 곳에 작은 힘이라도 남아있어서는 안 된다.  오랫동안 가슴을 설레게 했던 젊음과 사랑의 순간들을 떠올리며 기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자. 경기 종료의 공이 울리고, 권투장갑을 벗고, 피 묻은 얼굴을 닦고, 빈손으로 내려오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인생은 100라운드의 권투경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