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필] 인생 2막, 카이로스의 시간을 찾아서
[기자수필] 인생 2막, 카이로스의 시간을 찾아서
  • 김정근 기자
  • 승인 2023.10.11 08:2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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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르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가야

 

한동안 찾지 않았기 때문일까. 오랜만에 보는 사찰의 풍광이 다소 낯설게 다가온다. 산사의 고적함과 바람이 머물다 간 솔숲의 청량함, 목조에 새겨진 시간을 마음에 차곡차곡 담으며 느릿느릿 천년의 도량으로 들어선다. 비록 세월은 흘렀지만, 고찰古刹의 보이지 않는 위엄은 바래지 않고 오히려 깊이를 더해가는 듯하다.

대웅전 앞 연등에 간절한 소망을 걸고 있는 외국인 노부부가 보인다. 낯선 이국땅에서 색다른 문화를 체험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참으로 여유로워 보인다. 오래된 절 만큼이나 부부의 모습에서도 삶의 깊은 연륜이 느껴진다. 평생 가족을 위해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이제야 비로소 둘만의 행복의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리라.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어느 나라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연등에 걸어놓은 그들의 애틋한 가족 사랑이 절간을 가득 채우고, 그 간절함이 바람을 타고 바다 건너 먼 곳에 있는 가족에게까지 닿을 것만 같다.

은퇴 후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온전히 즐기는 그들의 모습에서 문득 나를 돌아본다. 지난 삼십여 년은 직장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아온 시간이었다. 끊임없이 동료들과 경쟁하며 오로지 목표에 도달하는 것에 집착하던 시절이었다.

퇴직 후 그 울타리를 넘어 새로운 세상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몸은 직장을 떠났지만, 마음마저 은퇴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가보지 않은 길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과 생소한 분야들,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과 마주하며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말이 실감 났다. 뒤늦게 발을 담근 다양한 분야의 매력에 조금씩 빠져들며 비로소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생계를 위해 앞만 보고 쉼 없이 달렸던 직장 시절과는 달리, 퇴직 후에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주변을 돌아보며 걸어가는 과정 자체가 큰 즐거움이 되는 것 같다. 늦었지만 내가 추구하는 가치를 찾아 여유롭게 삶의 여행을 하는 요즘이 참으로 행복하다.

인생 2막의 행복한 삶이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진정으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나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나 자신을 성찰하고, 다양한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 또한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리라 믿는다. 어차피 삶의 방식에 정답이란 없을 터, 이젠 뜀박질을 멈추고 나만의 방식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내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 가리라 다짐해 본다.

연등에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는 수많은 이들의 바람을 다시 바라본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내 바람도 그 옆에 살포시 달아 본다. 세월의 흐름에도 품격을 잃지 않는 천년고찰처럼 기품 있게 살아가기를 소망하며. 또한 내 삶의 남은 여정에 더 많은 카이로스의 시간도 펼쳐지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