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수필] 파마 가방
[기자 수필] 파마 가방
  • 최유정 기자
  • 승인 2023.06.26 15:44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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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마 가방을 머리에 인 엄마
칠십 넘어 무릎 수술로 휴식 시간 얻어
그 엄마의 길을 나도 따라 걷고 있어

“음” 새어 나오는 한숨은 휴식의 끝을 알렸다. 울퉁불퉁한 혈관이 드러난 손은 편안히 가슴에 놓여 있고 긴 잠에서 가늘게 눈을 뜬다. 엄마 스스로는 한 번도 청해보지 않은 단잠을 자고 일어났다. 잠잘 때조차도 억척스럽게 숨을 몰아쉬며 칠십의 고개를 넘었다. 무릎 수술은 그제야 엄마에게 쉬는 시간을 허락했다.

엄마는 손님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갔다. 촌으로 파마하러 갔다 오는 엄마를 마중 가는 길이었다. 파마 도구를 담은 가방을 머리에 이고 엄마는 손님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갔다. 엄마를 마중 가려면 귀신 이야기로 흉흉한 충혼탑의 산모퉁이를 돌아가야만 했다. 발에 밟히는 자갈 소리에 놀라서 돌아보면 정적만이 버티고 서서, 넘어가는 해거름에 늘어진 내 그림자만 오롯이 나를 쫓아왔다. 내 키만 한 자전거를 옆에 끌고 걷다 보면 금세 어두워졌고 그때까지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어깨는 무서움으로 움츠러들고 자전거를 끄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눈에 눈물이 맺힐 때쯤, 신기하게도 초록색 파마 가방을 머리에 이고 엄마가 나타났다.

엄마는 미장원을 차리지 않은 채 무허가로 파마를 해주는 야매 아줌마였다. 오일장이 서는 날에는 우리 집 작은 창고 안은 파마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엄마가 머리를 말아주면 나는 머리 감을 물을 떠주거나 고무줄을 풀어주는 일을 도왔다. 하지만 가장 힘든 일은 무허가 신고를 받고 출동하는 단속반을 망보는 일이었다. 대문 밖에서 골목 어귀의 낯선 아저씨들이 우리 집으로 향하면 소리를 질러서 알려야 했다. 위로 오빠나 언니가 있었지만, 공부에 대한 한이 많았던 엄마는 둘 다 고등학교를 대구로 유학 보냈다. 그때부터 엄마의 파마 보조는 내 차지가 되었고 나의 까만색 교복은 다른 친구들보다 무릎과 엉덩이가 더 반질반질하게 닳아있었다.

고등학교 원서를 쓴다고 교실이 술렁거렸다. 그때만 해도 공부 좀 한다는 친구는 대구로 고등학교 원서를 냈다. 나는 이들의 틈바구니에 끼일 수가 없었다. 그 당시 아버지께서 친구에게 써 준 보증이 잘못되어 집을 돌보지 않은 채 외박이 잦았고, 엄마도 무허가 신고로 파마하는 일을 그만둔 채 결국 병이 나서 고생하고 있었다. 집안 형편으로 대구 유학은 꿈도 못 꾸고 실업계 원서를 들고 울고 또 우는 나를 보며, 어느 날 엄마는 마치 어제는 없었던 사람처럼 다시 파마 가방을 이고 거리로 나섰다. 그렇게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지원할 수 있었다.

팔순이 되던 해, 엄마는 보행기에 몸을 의지한 채 세월을 붙잡고 다시 걸음마 연습을 시작했다. 파마 가방을 이던 하얀 머리카락은 염색으로 젊게 물들이고 파마를 말던 손으로 정성껏 세수하고. 로션을 발라 단장하고 나들이 가듯 엄마는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엄마의 오십 대를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습관처럼 그때의 엄마를 가슴에서 꺼내 본다. 마치 한 몸 같이 붙어 다니던 초록색 파마 가방이 보인다. 무거운 파마 가방을 이고 오던 느린 걸음도 생각난다. 여자이기보다 오로지 엄마의 길을 가고자 했던 삶이다.

그 엄마의 길을 나도 따라가고 걷고 있다. 비로소 엄마는 완전한 휴식을 얻었다. 내가 걷고 싶은 엄마의 길은 내 엄마가 걸었던 그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