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후된 ‘곡현’ 동네...‘새뜰마을’로 새롭게 단장
낙후된 ‘곡현’ 동네...‘새뜰마을’로 새롭게 단장
  • 조광식 기자
  • 승인 2019.04.05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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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현’은 두루미 곡(鵠), 고개 현(峴)
1960년대 후반 ‘양잠 우수마을’로 지정
레전드 ‘배천재’...‘축지법’ 사용 회자
'새뜰마을' 사업실시로 새롭게 단장한 도원2리(곡현) 마을회관(정면건물)
'새뜰마을' 사업으로 새롭게 단장한 도원2리(곡현) 마을회관(정면건물)

경북 의성군 봉양면 도원2리 ‘새뜰마을'(일명 곡현)은 선방산 줄기가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고 북쪽으로 갈뫼봉(탑산)에 이어져 있다. 마을 앞에는 1994년 개통된 중앙고속도로와 의성IC가 있다.

낙후된 곡현 동네가 2016년 새뜰마을로 선정되어 사업비 19억8천600만원으로 새롭게 단장하여 작년 12월 18일 준공식을 가졌다. 그동안 슬레이트 지붕개량, 빈집철거, 노후주택정비 등 주택 정비사업을 통해 주거환경을 개선하고 마을안길 확장, 위험지구 축대 옹벽 정비, 소화전 설치 등을 통해 생활안전·위생 인프라를 개선하였다.

'새뜰마을'사업으로 마을 안길 확포장되고 담장이 정비된 모습
'새뜰마을'사업으로 마을 안길이 확포장되고 담장이 정비된 모습

‘곡현’은 두루미 곡(鵠), 고개 현(峴)

곡현(鵠峴)은 마을 앞산 모양이 두루미 형상을 닮았다고 두루미 곡(鵠), 고개 현(峴)자를 써서 ‘곡현’ 또는 ‘두룸태’라고 불렀다.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전라도 강진에서 배경운 씨가 입향하여 분성 배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그 후 1907년 의성 용연에서 아주 신씨 신홍식씨가 마을에 살게 되었고 이어서 손씨, 이씨, 김씨, 박씨 등이 입향하여 마을을 이뤘다.

1960년대에는 약 100가구의 600여 명의 주민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옹기종기 평화롭게 살았다. 수리시설이 부족하여 적기에 모내기를 못하는 대신 기장, 조, 콩 등을 파종하였고, 소득이 낮아 빈궁을 면치 못하는 마을이었다. 1960년 후반에 산을 개간하여 뽕나무를 심어 양잠을 하면서 주민들은 살기가 점차 나아지게 되었고 양잠 우수마을로 지정되기도 했다. 새뜰마을 사업이 실시되기 전까지는 낙후된 옛날 모습 그대로의 ‘곡현’ 동네였다.

지난해 12월 18일 '새뜰마을' 준공식에서 김주수 군수가 축사를 하고 있다
2018년 12월 18일 '새뜰마을' 준공식에서 김주수 군수가 축사를 하고 있다

전설의 ‘임금바위’... 토템숭배 ‘서낭당’

곡현마을에는 옛날부터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설의 ‘임금바위’와 오며가며 돌을 던져 복을 빌던 서낭당이 있다.

먼저 ‘임금바위’ 혹은 ‘임금등’이라고 부르는 전설의 바위는 마을 뒤 선방산에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음지에 위치하고 있다. 일제시대 때 일본군인이 바위를 깨기 위해 쇠망치를 내리치니 맑은 하늘에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치며 소나기가 쏟아졌다는 설과 또 다른 설은 고대국가 ‘조문국’ 때 임금이 난을 피해 이곳에 피신했다는 구전이 전해오고 있다.

다음으로 서낭당은 마을에서 북동쪽으로 약 1.2km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방도로가 개통되기 전 구(舊)비안에서 탑리(금성면)로 가던 옛길 산마루에 있다. 1960년대 5일장인 ‘도리원장’을 보러 인근 마을 사부래이 덕은동 탑리의 주민들이 다니면서 서낭당에 돌을 쌓거나 침을 세 번 뱉으면 좋은 일이 생긴다며 서낭님께 기원하던 곳이다. 서낭당에는 고목이 몇 그루 있었는데 한국전쟁 당시 소실되고 지금은 돌 더미와 잡목만 우거져 있다. 토템신앙을 믿던 주민들의 서낭당이 무관심 속에 사라져가는 것이 아쉽게 느껴진다.

'새뜰마을 준공기념비' 마을회관 앞에 세워져 있다
마을회관 앞에 세워진 '새뜰마을 준공기념비'

‘축지법’을 사용(?)한 ‘배천재’

곡현에는 아주 유명한 ‘배천재(배용근)’라는 분이 계시는 데 그 분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배천재는 1940년부터 배씨 재실에서 서당을 운영하면서 한글과 한문을 비문해자들에게 가르쳤다. 일제시대 때는 한글을 가르치며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는 이유로 수배를 받기도 했다. 학교나 서당에서 공부를 한 적이 없고 독학으로 한문, 역사, 풍수지리, 관상, 파자(破字), 점(占), 한의술까지 능통하여 ‘배천재’라고 불렀다. 이밖에도 배천재에 관한 얘기는 지금까지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배종두 씨는 “배천재는 축지법을 썼어요. 1960년대 동생과 함께 대구를 갔는데 원대정류장에서 동생을 먼저 버스를 태워 보냈는데, 동생이 집에 와서 보니 형(배천재)이 소죽을 끓이고 있었다”고 하면서 “그때는 도로도 비포장이고 버스도 자주 다니지 않던 때라 다른 교통수단은 생각할 수도 없다”고 했다. 의성지역에서는 배천재가 여러 가지 ‘축지법’을 썼다는 말이 아직 회자되고 있다.

그는 광복 후 청구대학 강사와 대구공고 교사, 군위, 봉양, 안계 등지에서 중고등학교 한문과 국어를 가르쳤다. 배천재의 딸 배분남 씨는“아버지가 대구공고 근무할 때 전두환 전 대통령의 스승이었다"면서 "그러한 인연으로 대통령이 된 후 비서관을 시켜 남북 관계에 대한 여러 가지 자문을 자주 구하러 왔다”고 말했다. 또 “한의학에도 능통하여 대구와 서울 등지 한의원에서 아버지를 모시고자 했으나 삼고초려를 해도 가지 않고 여생을 조용히 곡현에서 보냈다”면서 잠시 아버지 생각에 잠겼다.

딸 배분남(면사포 쓴)씨 결혼식. 뒷줄 좌측 가슴에 꽃 다신 분이 '배천재(배용근)'
딸 배분남(면사포 쓴)씨 결혼식. 뒷줄 좌측 가슴에 꽃 다신 분이 '배천재(배용근)'

전수옥 이장, 앞으로 ‘주민을 위한 공간’ 마련하고 싶어

전수옥 이장은 “마을 전체 56가구 120여명의 주민이 새뜰마을 사업으로 혜택을 받았으며, 전에는 마을 안길이 좁아서 경운기도 겨우 다녔는데 지금은 큰 화물차도 다닌다”고 하면서 “담장을 새롭게 하고 빈집 및 스레트 철거 재래식 화장실 15동 신축 주민들 80% 집수리 마을회관신축 소공원조성 상수도교체 등으로 곡현이 너무 좋아졌다”고 전했다.

그리고 전 이장은 “마을회관 신축으로 단열이 잘 되고 공간이 넓어져서 어르신들이 함께 식사를 하니까 가스와 전기 절약은 물론이고 외롭게 혼자 식사하는 것이 사라졌다”면서 어르신들이 회관에 머무는 시간이 종전보다 늘어났다고 했다. 또 “앞으로 주민들의 협조와 군의 지원을 받아 빈집 찜질방 만들기, 공터 냉동창고 신축, 공동농기구창고 등을 짓는 게 할 일이다”라고 힘주어 포부를 말했다.

‘새뜰마을’ 곡현은 레전드로 남은 배천재와 전설속의 ‘임금바위’, 토템숭배를 했던 ‘서낭당’과 함께 새롭게 도약의 꿈을 꾸고 있다.

'새뜰마을' 부녀회 회원들 뒷줄 좌측 두 번째가 전수옥 이장
새뜰마을 부녀회 회원들과 전수옥 이장(뒷줄 왼쪽 두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