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수필] 봄 처녀 제 오시네
[기자 수필] 봄 처녀 제 오시네
  • 권오훈 기자
  • 승인 2023.03.31 15:1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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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이 SNS로 영상을 하나 보내왔다. 쇼팽의 '봄의 왈츠'가 은은히 울리며 꽃봉오리가 벌어지고 새잎이 돋아나는 장면을 담은 영상이다. 우리 눈에 식물은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않는 것 같지만 앵글을 맞추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다. 꽃 몽우리가 팡팡 터지고 한 잎씩 꽃잎이 펼쳐지더니 부드러운 봄바람에 하느작하느작 날갯짓, 손짓한다. 식물이 생의 환희를 저리도 적나라하게 표현하나 싶어 한 번 더 재생해서 보았다.

마른 가지에 연두색 기운이 감도는가 싶더니 어제 내린 봄비에 뾰족뾰족 새싹이 돋아난다. 볼 게 많아 봄이라 했든가 어디라 할 것 없이 집만 나서면 파릇파릇, 울긋불긋 볼거리가 많은 계절이다. 눈길 닿는 곳마다 꽃, 꽃, 꽃이다. 시인은 그런 꽃들에게 투정을 부린다. "꽃들도 그렇지. 왜 한꺼번에 피어서 나를 주체하지 못하게 하는 거야."

꽃이 대중없이 피는 것 같지만 조물주가 점지해 준 나름의 섭리에 맞춰 인간 못잖은 치열한 생존방식으로 꽃을 피운다. 한 해전 여름부터 꽃눈을 준비한다.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고 10도가 되면 개화 호르몬이 분비된다. 《먼 산엔 노랑꽃》이란 어느 수필집 제목처럼 개나리, 산수유, 민들레 같이 지닌 꿀이 적은 꽃들은 벌, 나비의 눈에 잘 띄는 노란색 옷을 입고 남 먼저 피어난다.

식물의 꽃은 사람의 몸으로 치면 어느 부위일까? 생식기에 해당할 것이다. 암·수꽃술이 교접하여 수정해야 아기인 열매를 맺는다. 수정을 위해 식물은 나름의 지혜를 발휘한다. 독특한 향기와 화려한 색깔, 예쁜 모양으로 곤충을 유혹하는가 하면 꽃피는 시기를 조절하여 경쟁 우위를 점하고 중매쟁이 벌 나비의 노역을 분산시켜준다. 심지어 한 가지에서조차 피는 시기를 조절한다. 중매쟁이는 벌 나비 같은 곤충 말고도 있다. 바람이 수정해 주는 송화와 밤꽃이 있나 하면, 동박새는 동백꽃과 무궁화의 깊은 몸통 안 꿀을 부리로 빨아먹으며 수정을 돕는다. 식물에까지 그런 본능을 부여하신 조물주의 배려는 실로 조화롭고 웅숭깊다.

남촌에서 살랑살랑 꽃향기 실은 봄바람이 불어오는데 집안에만 처박혀 있을 처녀·총각이 과연 있을까. 감수성 풍부한 처녀들부터 봄바람이 난다. 봄 처녀 제 오시네. 새 풀 옷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 쓰고 진주 이슬 신으셨네. 꽃다발도 가슴에 안았네. 나를 찾아오신 게 분명할 거야. 봄 처녀 오시는데 봄 총각인들 보고만 있을까. 중년 넘긴 나까지도 봄바람이 든다. 너도나도 “봄이다. 집 나가자”라며 뛰쳐나간다. 어쩌면 집안에만 있는 것은 봄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집 가까운 수목원은 꽃구경 인파로 몸살을 앓는다는 소식이다. 처녀·총각만 꽃을 좋아할까. 허리 통증으로 바깥출입을 꺼리는 어머니도 올봄 풍경이 궁금하시리라. 어머니 모시고 봄꽃 흐드러지게 핀 교외로 드라이버나 다녀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