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나루를 아시나요
낙동나루를 아시나요
  • 안영선 기자
  • 승인 2022.08.3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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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백산 너덜샘에서 출발한 물이 흘러흘러 검룡소를 지나면 낙동강물이 된다. 낙동강 물은 영호나루, 강창나루, 화원나루, 130여개의 나루를 지나면서 일천 삼백리를 흘러 일몰이 아름다운 부산 몰운대로 흘러 간다.

낙동강 나루중 가장 유명하고 이야기거리가 많은 곳은 낙동나루다. 대구에서 낙동나루에 가려면 칠곡을 지나 천평, 해평을 지나 승용차로 한 시간 정도 달리면 도착하는데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낙정리라고 네비에 찍으면 안내가 된다.

낙동나루는 낙동앞나루, 낙동도선장, 낙동진, 낙정나루, 관수진 등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의성군 낙정리와 상주군 낙동리를 낙동강이 가로 막은 걸 배를 타고 건너던 곳이 낙동나루다.

낙동나루 인근에 낙단보, 관수루, 만경산 등산로, 생송리 마애보살좌상,이 있어 시간이 있으면 여기를 둘러 봐도 좋다.

낙동나루는 옛날 부산 구포에서 출발한 세곡(稅穀)을 싣고 와 낙동나루에 내려서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운송되는 길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늘 붐비고 번창했다. 언제부터 뱃길이 열렸는지 기록은 없지만 아주 먼 옛날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라고 보면 되고, 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조로 이어지면서 큰 나루로 발전하였다고 볼 수 있다.

동래에서 낙동나루를 건너 문경새재를 지나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가던 유생들이 반드시 통과해야하는 곳이 낙동나루였고 부산에서 소금과 해산물, 옷감, 석유, 연초, 등을 싣고 오는 장사꾼들이 북적거리며 돈이 움직이는 곳이 낙동나루였으며 이곳에서 각 지방으로 흩어졌다.

낙정리에는 가흥창이라는 세곡을 임시 보관하는 큰 창고가 있었는데 중종15(1520)에 가흥창 부근의 헌 절을 헐어 창고 70칸을 짓고 헌종 때 49칸을 새로 지어 세곡을 임시 보관했다고(충주지, 2001)전해지는 걸 보면 창고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또 낙정리에는 낙동역이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파발제도의 역참이 있었는데 발장 1인과 발군 5명에 말 15마리, 가마 5필과 도선군 15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동래에서 서울까지는 역로의 거리로 962리로 11일이 걸린다고, <동래부읍지>는 알려준다. 그러나 파발로는 기존의 역로와 일치하는 경우도 있지만, 지리에 밝은 파발꾼은 주로 소로를 이용해 먼 거리를 단축시켰다. 파발로는 동래에서 서울까지 920여 리로 밤낮으로 달리는 파발꾼은 2-3일이면 급보를 전달 할 수 있었다.

또 낙정리에는 염창(소금창고)이 있었다며 전 단밀면장 안승호(낙정리거주, 82)씨가 전해 주었는데 지금 마을에서는 염채이라고 부른다고 하며, 역참에는 말이 여러 마리 있었는데, 이 말들이 죽으면 묻었다는 골짜기 말무덤이도 있다고 안내를 해 줬다.

여름 장마와 홍수철에는 도선군이 15명이 있어도 강을 건너기가 어려워 위급한 상황에만 관선(官船)을 띄워 건너주는데 위쪽으로 올라가 조금씩 떠내려가면서 강을 건넜다. 도선군(渡船軍)을 도진군과 진척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진척은 고려시대 부터 조선조 까지 큰 나루에 배치한 신분이 낮은 뱃사공을 부르는 말이다.

광복 이후에도 생필품을 실은 장삿배는 낙동나루에 계속 왕래하였으나 그후 신작로가 생기고 자동차가 많아지면서 낙동나루에는 평저선인 도선이 민간에 의해 인력으로 삿대를 저어 운영되었다. 자동차 1대에 2천원, 주민들에게는 보리철과 나락철에 각 가정에 3말씩을 거두어 갔으며, 외지의 사람이 건너는데 배삯은 50원정도 였다고 의성군지(1998)에 전한다.

지금의 낙정나루의 흔적은 사라지고 낙단교가 1986년 준공되어(길이 434미터, 10미터) 강을 건너고 있다. 낙동나루에 도선은 1986924(낙단교 개통 이틀전 까지) 운행되었다낙단교는 낙동의 낙()과 단밀의 단()을 따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