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61)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61)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2.04.2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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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우수에 젖은 듯도 보였고, 알 수 없는 조바심으로 가슴을 태우는 듯도 했다
일가친척으로 피붙이 들이라 안 좋은 일이 무엇에 있을까요?
삽짝을 나서는 순간 죽은 셈 치고 시댁에 깊숙이 뿌리를 내려 잘 살라는 것이다
2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2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감골댁의 어머니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사탕발림처럼 입에 발린 빈말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감골댁이 칭찬을 곁들여 평가한 이상으로 음전한 중에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조용조용했다. 부창부수가 아니랄까봐 아버지처럼 잠시도 손을 놀리는 법이 없었다. 할머니가 안쓰러움에 잠시 쉬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런 한편으로 할머니를 두고 도리어 농사일이 힘들다며 쉬라며 권유다. 그런 와중에 할머니가 지나가는 말로 친정에 대해서 물으면 늘 쓸쓸한 웃음으로 대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정 많은 오라비라지만 부모에게는 비견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따뜻한 아랫목에 앉았어도 윗목에 앉은 듯 추워 보였고, 늘 우수에 젖은 듯도 보였고, 알 수 없는 조바심으로 가슴을 태우는 듯도 했다. 그런 어머니를 할머니는 나무라기보다 포근하게 감싸 안아 딸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어머니가 임신을 했다. 허니문 베이비는 아니었지만 할머니의 기대에 부흥하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빠른 임신이었다. 입덧이 그렇게 심했던 것은 아니지만 5~6주째로 접어들면서 음식을 멀리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머니의 임신 소식에 할머니는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동네 사람들조차도 얼마 만에 들어보는 애기 소식인가 싶어 다 같이 축복이란다. 이런 경사스러운 일이 어디 있을까 싶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집안 경사이기도 하지만 동네 경사라며 애기가 태어나면 너 나 없이 손을 보태서 동네가 키워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었다. 가끔 인사 차 들린 또래의 아낙네들은 내 일인 양 어머니께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하라며 언질을 주고 갔다. 그 또한 미흡하다 싶으면 아예 음식을 만들어 찾아왔다. 그렇게 동네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어머니는 늘 고맙다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얼굴 위로는 억지로 꾹꾹 눌러 참았다는 듯 헤픈 웃음이 늘어나고 있었다. 임신을 계기로 어머니의 얼굴 위로 화색이 도는 날이 많아지고 있었다.

할머니가 그간의 세세한 소식도 전할 겸 소원했던 친정을 다녀오라고 등을 떠밀어도 도리질로 거부하던 때와는 달리 임신을 계기로 오라버니가 잘 있는지, 조카들은 무럭무럭 자라는지 궁금하다며 은근하게 친정을 입에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불러오는 배가 발목을 잡고 있었다. 길만 가까우면 어째 또 마음을 먹어 보겠지만 산과 내가 겹겹이 가로 막는 데는 어쩔 수 없었다. 그렇더라도 어머니는 많이 행복해 했고 이제야 시집에 든든한 뿌리를 내린다 싶었는지 가끔 의견을 내는 등 말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멸망해도 살아남는 두 가지를 꼽으라면 바퀴벌레와 고부관계다. 그러고 보면 고부지간에 동상이몽이라고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할머니가 어머니를 닦달하지도 나무라지도 않았건만 어머니가 할머니를 마주할 때는 늘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습이 대변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할머니가 어머니의 행동거지를 유심히 살피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시집이라 온 곳이 산간 지방에 유배를 온 듯 답답하여 야반도주라도 할까? 하여 두려운 모양이었다. 얼마나 어렵게 맞은 며느리였던가? 혹시나 생각을 달리 먹은 어머니가 사라진다면 만사가 끝장이라고 할머니는 생각했다. 그때 할머니는 어떻게든 어머니가 도망을 못 가게 막는 일이 자신에 맡겨진 임무라 여겼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로부터 감시의 눈을 거둘 수가 없었다. 어머니도 밤낮 주야 할머니의 눈길이 자신을 따라 다닌다 여기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알 수 없다는 듯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런 가운데 밤이면 밤마다 내외가 이불 밑에서 소곤거리는 모양새가 부부지간도 원만해 보였다. 또 어디로 도망을 갈 기미도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럼 왜 그럴까? 도대체 무슨 이유인가 알고 싶은 할머니였다. 무슨 까닭인가 싶은 할머니는 어머니가 자신을 어렵게만 여기고 두려워하는 내력을 몰라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내리사랑이라고 이런저런 조건이 마음에 들어 마음껏 사랑을 주고 싶지만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밀어내는 며느리의 속마음을 헤아릴 수 없어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세상 물정을 몰라 천둥벌거숭이처럼 싸돌아다니는 딸이랑 다가갈수록 자신을 멀리하는 며느리 사이에서 할머니 자신은 늘 외롭다 여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답답한 마음을 하소연할 겸 감골댁을 만난 자리에서 할머니가 은근하게

“동~상! 혹 우리 며느리가 시집오기 전에 친정 쪽에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하고 물었고

“성~님! 제가 알기로는 그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동네라 하지만 몇 집이 안 되는 중에 사람들이라고 해야 20~30여명 남짓에, 게다가 타성바지는 별로 없고 거의가 일가친척으로 피붙이 들이라 안 좋은 일이 무엇에 있을까요? 근데 왜 그러세요! 듣는 게 처음이라고, 금시초문입니다. 이리저리 수소문해서 은밀하게 알아볼까요?”하고 감골댁이 의뭉스럽다는 투로 말했을 때 손을 내 저은 할머니는

“아니야 알아보기는 뭘!”하고 일 없다는 듯 손사래를 치고는

“일찍이 부모를 여위어 마음속에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들어앉은 게야!”하고 넘겼다. 한데 임신 후 서서히 달라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는 세세히 따져보지 않은 일은 잘했다 여겼다. 그렇다고 아직 완전히 마음을 놓을 상태는 아니라는 것이 할머니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선녀와 나무꾼에서도 아기를 넷 놓을 때 까지는 안심하지 말라고 했다지 않는가? 살기 힘들다고 애기를 놓고 나서도 도망가는 일이 비일비재라...! 임신 사실을 알고부터 저래 웃음이 흔해지고 말수가 늘어나는 모양새가 더 수상스럽다고 여기는 할머니다.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별일이 아닌 것도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 사람의 심리다. 까닭을 모르는 할머니의 마음은 의처증인 듯 의부증인 듯 외골수로 흐르고 있었다. 단도직입 보다는 언제고 조용한 날 차근차근 물어 보리라 작정을 할 뿐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임신을 한 뒤 달라지기 시작한 이유는 한 사건을 두 눈으로 보아 생생하게 겪은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그동안 마음을 열지 못한 것도 다 그 때문이지 다른 마음은 결코 없었다. 할머니가 싫어서도 아니었다. 특히나 야반도주는 전혀 언감생심이었다. 그건 전적으로 할머니의 오해였다. 당시 어머니는 할머니가 보따리의 ‘보’자만 꺼내도 마음속으로 까무러지고 있었다. 이제 소박을 맞는 모양이다 싶어서다. 만약 그때 할머니가 장난삼아라도 헌옷 보따리를 마당에 던졌더라면 어머니는 곧장 뒤 산으로 올랐을 것이라 했다. 소나무가지에 무명천을 걸 작정이었다고 했다. 시집을 왔으니 시집 귀신이 되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막 철이 들 무렵 마을 처녀 둘이 거의 같은 시기에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대처로 시집을 갔다. 작은 마을에서 두 집이나 혼례가 있다 보니 벌집을 쑤셔 놓은 듯 동네는 온통 시끌벅적했다. 양쪽의 신부 집안은 그야말로 총기만 없을 뿐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얕은 밑천으로 혼수를 장만하려다 보니 발칵 뒤집어 진 것이다. 남부럽지 않게 혼수를 장만하려다 보니 벌어지는 일이기도 했다. 원래도 먹고 죽으려 해도 없다는 돈, 두 집안의 혼수 장만으로 인해 동네에서 돈이라곤 구경하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산골 살림에 장만하면 뭘 얼마나 장만하겠나?

비단금침은 흉내도 못 내 무명이불 두어 채에 신랑의 입성 두어 벌, 시부모 한복 한 벌, 그 외 시아주버니와 시누이의 등등에 예단 조금, 패물 조금, 태어날 때 심었다던 오동나무를 베어 만들었다는 적당한 크기의 반닫이 농, 그 외에 양은솥을 포함 보시기 등의 자질구레한 살림살이가 혼수 준비의 거의 전부였다. 그것만 해도 기둥뿌리가 쏙 뽑아져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더라도 오매불망 잘 살라는 것이 친정 부모의 진실한 마음이었다. 오늘 이후 친정 쪽으로는 돌아보지도 말고 꿈에라도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서방만, 시댁만 생각하고, 친정 부모는 삽짝을 나서는 순간 죽은 셈 치고 시댁에 깊숙이 뿌리를 내려 잘 살라는 것이다. 아들 딸 쑥쑥 낳아 잘 사라는 것이었다. 그것만이 늙은 아비어미가 돈수백배 바라는 바이고 진정한 효도라고 가마가 떠나는 날 딸내미의 귀에 딱지가 앉도록 당부에 당부, 신신당부했던 말이기도 했다. 맞잡은 손에 눈물바람으로 했던 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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