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59)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59)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2.04.11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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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는 오로지 놀기 위해 밤을 원망하고 있었다
색색으로 오색댕기를 사들여 고모를 치장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특별하게 눈에 들지 않은 것이 촌부의 딸로서는 신상에 편하다는 생각이었다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계림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계림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미라와 다를 바 없던 몸이 탈피 과정을 지나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던 고모는 다음 해 봄이 한창이던 어느 날을 맞아 뱀 허물 같은 이불을 걷어차고는 바깥나들이에 나섰다. 14년을 지나 15년 만에 처음으로 바깥 세상을 대하는 고모의 눈에는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마당 가로 우후죽순처럼 자라는 잡초도, 창공을 훨훨 날아다니는 참새를 비롯한 새들은 물론이고 그동안 귀동냥으로 배우던 간접 공부를 직접 대하고 보니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게다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예쁘다며 엄지를 치켜세우다 보니 밤이 왜 생겼나 싶었다. 아버지가 일에 빠져 밤을 원망했다면 고모는 오로지 놀기 위해 밤을 원망하고 있었다.

그즈음 할머니도 덩달아 신나 있었다. 그동안 딸자식을 둔 어미가 누리지 못한 깨알 같은 버킷리스트를 마음껏 누리고 있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즈음 방물장수, 도부장수, 황아장수(예전에 집집을 찾아다니며 끈목, 담배쌈지, 바늘, 실 등의 자질구레한 일용품을 파는 사람을 이르던 말)가 동네를 찾을 때면 으레 할머니의 집을 숙주로 여겨 보따리를 풀었다. 물건을 팔건 못 팔건 불문율이었다. 그럴 때면 대처에서 들여온 물건 구경을 핑계로 동네 아낙네들이 진을 친 가운데 방물, 도부, 황아장수는 세상사 보따리를 풀어서 이목을 끌었다. 이는 큰스님의 명에 따라 만행을 나갔던 스님들이 돌아와 바깥세상에서 겪은 이야기보따리를 푸는 것과 흡사했다. 스님들로부터 만행에서 격은 세세한 사연들을 전해 듣는 것으로 큰스님은 앉아서 천리를 내다보는 지식을 얻는 것이다. 동네 아낙들 또한 방물, 도부, 황아장수의 구수한 입담을 통해 세상사에 대한 자질구레한 이야기보따리에 흠뻑 빠져들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재미나고 동감하여 관심을 끄는 대목은 산골 처녀의 시집살이다. 이야기 중 소박을 맞은 장면에서는 내가 당하는 듯 안타까워했다. 음전하고 착한 산골 처녀가 못된 시어머니의 온갖 구박 끝에 친정으로 쫓겨나는 대목에서는 내 남 없이 옷 고름을 접어 눈물을 찔끔거렸다. 그리고 다음의 어느 날에 그 산골 처녀가 우여곡절 끝에 시댁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에는 내 일처럼 손뼉을 쳐서 기뻐했다. 꾸며낸 이야기든 실제 있었던 이야기든 시어머니의 가살궂은 장면에서는 다들 집안에 들어앉은 시어머니를 떠올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시간을 잊은 질펀한 수다 끝에

“벌써 이렇게나 됐나!”하고 자리를 털 때면 방물, 도부, 황아장수는 하나같이 할머니 치맛단 밑으로 무언가를 찔러 넣었다. 그 중엔 머리핀도 있었고, 골무도 있었고, 간혹 구리로 된 가락지나 댕기, 얼레빗 등도 있었다.

“지난번에도 이러시더니만 미안스럽게 오늘도 이러시네요! 이문이 남게 팔아준 것도 없는데...!”하고 순박한 촌 인심에 사양지심이 인 할머니가 얼른 집어서 자배기에 도로 넣을 때면

“장소 값에, 새참 값에, 물 값 이구만, 그냥 넣어 두시유! 그래야 다음 날에 또 내 집같이 여겨 무시로 드나들지요!”하고는 자리를 턴다. 둘러앉은 동네 아낙네들조차

“별거 아니구먼! 마음 편하게 그냥 넣어 두세요!”하는 말에

“이거 번번이 미안하구만!”하는 할머니는 못이기는 척 방구석으로 던지듯 밀어 놓고는 먹으려고 장만해 놓은 푸성귀 따위를

“이거 별것 아니라요!”하며 보답 차원에서 누렇게 색 바랜 신문지 등으로 주섬주섬 우므려 싸서는 봇짐 한쪽 구석머리에 쑤셔 박는다. 그렇게 더러는 사고 더러는 물물교환처럼 얻어서 모아온 패물 등으로 고모를 치장하는 할머니다. 그러던 어느 때는 일삼아 고모를 앉혀놓고는 칠흑 같은 머리채를 참빗으로 곱게 빗는 중에 5:5로 가르마를 짓던 할머니가

“어디보자! 오늘은 우리 끝순이 머리를 새색시처럼 한번 틀어서 올려볼거나!”하고는 뒷머리로부터 틀어 올려서는 풀어지지 않게 나무꼬챙이를 질려 놓고는 앞 뒤태를 살펴보다가는

“옥잠이나 나비잠이 아쉽네! 하다못해 구리 비녀라도 있었으면...!”하고는 손으로 턱을 받쳐서 요모조모 찬찬히 살펴보다 간 자지러지듯

“내 딸이라서가 아니라 어쩜 이토록 이쁠까? 한 떨기 장미꽃인들 이처럼 빼어날까? 여포의 초선인들 이리 이쁠까? 평원대군의 초요갱인들 이 미모에 부러울까? 아니면 이도령에 춘향이라고 설마하니 기가 죽을까?”하고는 다시 풀어서는 등줄기를 따라 길게 땋아 보는 것이었다.

늘 환상에 젖어 살던 꿈을 벗어난 기쁨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고모의 치장에 취한 할머니는 그동안 애면글면 모아온 돈을 아낌없이 풀어 삼회장저고리는 물론 까치저고리에 녹의홍상이라고 녹색저고리에 다홍치마도 사고 색색으로 오색댕기를 사들여 고모를 치장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오늘은 옥색을 멜까? 아니지 어제가 옥색이니까 오늘은 붉은색이지!”하며 이것으로 할까? 저 것으로 할까? 고민하는 할머니다. 그즈음 할머니는 빼어난 미색의 고모로 인해 졸지에 옷 잘 고르는 할머니로 까지 통했다. 게다가 동네 처녀들은 옛날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서시를 본 당시의 처녀들처럼 고모의 옷차림이나 댕기의 색깔을 따라 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었다.

서쪽 지방에 산다는 ‘서씨’라는 뜻에서 서시로 통하는 그녀는 병사들의 갑옷을 빨래하는 여자란 뜻의 완사녀(浣紗女)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서시는 시냇가에서 갑옷을 빨았다. 한참이나 갑옷을 빨던 서시가 잠시 쉬는 동안 물속을 들여다 볼 때다. 그러자 때를 기다렸다는 듯 물속으로 고기 떼가 바글바글 몰려들고 있었다. 갑옷에서 흘러나오는 짭조름한 염분을 먹으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던 중 물고기들이 눈을 동그랗게 떠서 위를 쳐다보다 간 서시의 아름다운 미모에 취해 헤엄치는 것을 잊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고 한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서시에게 침어(侵漁)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옥에도 티가 있듯이 서시는 편두통이 극심했던 모양으로 두통이 도질 때면 늘 얼굴을 찡그렸다고 한다. 한데 그 모습마저 사람들에게 예쁘게 보였던지 월나라 처녀들은 저마다 서시를 흉내를 내서 무시로 이마를 찡그렸다고 했다.

14년을 지나 15년 만에 새로 태어난 고모! 고모가 특출한 미모로 동네 처녀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 가운데 마냥 신이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들판을 쏘다니는 것과는 달리 할머니는 근심은 늘어만 가고 있었다. 여자의 미모가 너무 빼어나서도 안 된다는 것이 할머니의 생각이었다. 미인박명에 박복이라고 여자는 그저 수더분하게 생기는 것이 무난하게 사는 것으로 행복이란다. 명문 세가 집안의 금지옥엽 딸도 아니고, 없고 못사는 집구석의 딸자식일수록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아무 게 집의 딸이 어떻다고 소문이라도 퍼지고 나면 분명 이 놈, 저놈의 놈팽이(놈팡이의 비표준어로 ‘사내’를 얕잡아 이르는 말)에 잡것들이 꺾으려 들것은 자명한 이치다. 결혼을 전제로 한다기보다는 호기심이 동하여 무력으로 꺾으려 드는 데서 불행을 불러들인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들판에 무리지어 핀 야생화처럼 특별하게 눈에 들지 않은 것이 촌부의 딸로서는 신상에 편하다는 생각이었다.

중국 4대 미인에는 들지 못했지만 조비연이란 여인만 봐도 명확하다. 본명은 조의주, 시호가 효성황후인 그녀는 전한의 성제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다. 몸이 가벼워 춤을 잘 추었던 그녀는 황제의 손바닥에서 춤을 추었다고 해서 ‘작장중무’로 통했지만 황제가 죽고 나자 궁에서 내쳐진 끝에 유리걸식, 행려병자로 떠돌다가 굶어 죽었다질 않는가? 할머니는 이런저런 고사를 통해서 고모의 아름다운 미모가 훗날에 이르러서는 고모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갈 것이라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고모가 여전히 사랑스럽고 귀여워 잠시 동안 미래를 잊는 중에 할머니는 감골댁으로 부터 또 다른 낭보를 전해 듣고는 기쁨에 들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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