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64)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64)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2.05.16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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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첨성대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첨성대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초여름으로 접어드는 햇살은 여간 매섭지가 않았다. 조금만 꿈적거려도 이마로 송골송골 맺히는 땀방울과는 달리 이삼일만 가물어도 물 부족 현상이 나타난다. 목말라하는 논바닥이 거북이등처럼 쩍쩍 갈라진다. 한 방울의 물도 아깝다 싶어 거친 숨을 내쉬는 소를 몰아 써레질 후 논두렁을 손봤다. 드렁허리의 굴을 팠는지, 자발없는 생쥐들이 드나들지나 않았는지, 무너진 곳은 없는지 일일이 찾아서 물샐틈없이 잡도리를 했다. 하지만 하늘의 심술에는 헛수고모양 방법이 없다. 속수무책으로 하늘을 우러러 긴 한숨만 내쉴 뿐이다.

방금 모내기를 끝낸 논이라 더욱 그런가 보다. 태종우라도 내렸으면 했지만 하늘은 어제나 오늘이나 감감무소식이다. 연일 땡볕만 한결같다. 연두색의 가녀린 어린모들이 죄다 벌겋게 타들어간다. 타들어가는 모포기 만큼 농부의 마음도 숯덩이가 된다. 그럼 판국에 내 논에 들어가야 할 보도랑 물이 옆 논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보건데 눈에서 불통이 튀긴다. 처자식의 입을 생각하건데 이는 어느 농부라도 마찬가지다. 선한 농심을 따질 바가 아니다.

치미는 울화를 참지 못해 눈에 보이는 연장이랑 연장은 가리지 않고 들어서는 으르렁거린다. 쇠스랑이든 낮이든 상관없다. 한국전쟁 당시 공비를 때려잡듯 마주서서는 곧장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한 치의 여유도 없다. 해를 거듭하여 연례행사처럼 치르는 지라 도저히 풀어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오히려 거듭될수록 앙금처럼 차곡차곡 쌓여 깊어만 간다. 그 와중에 아들이란 것이 부모의 심정도 모르고 원수와 다름없는 집안의 딸년과 밤이고 낮이고 염문을 뿌리고 다닌다는 소문이 온 동네에 자자하다. 궁리 끝에 둘을 갈라놓기 위해 장가를 들이기로 결정을 보았다. 수소문 끝에 처녀가 결정 되었다. 악연을 피한다는 이유를 들어 막무가내로 결혼을 시켜버린 꼴이 되어 버렸다. 아들도 웬만하면 사귀는 처녀가 있노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두 집안의 악연을 생각할 때 맞아죽지 않으려면 그럴 수가 없었다.

“어디 여자가 없어서 하필이면 그 따위 집안의 딸년이랑 눈이 맞아!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어림없다”하고 부모로부터 불벼락이 떨어질 것을 불을 본 듯 명징하다. 두려움과 무서움으로 감히 나서지를 못한다. 입도 뻥긋 못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혼례를 올리고 보니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둘이서 남몰래 차린 신혼 방이 물레방아간인지, 종달새처럼 보리밭인지, 대나무 숲인지는 알 길은 없으나 이미 선을 넘어버린 탓에 임신을 하고 있다. 임신을 한 동네 처녀는 이대로 아비 없는 자식을 놓고 싶지 않았다. 어느 날 밤을 맞아 아들이 동네 처녀를 만나고 보니 비장한 각오를 한 듯 이 밤으로 도망을 가자고 한다. 튼튼한 몸뚱이가 있는데 어디를 간들 설마하니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칠거냐는 것이다. 당분간 먹고 살 재물은 농을 뒤지고, 안방과 사랑방을 뒤지고, 아버지의 호주머니를 뒤진 끝에 웬만큼 수중에 지니고 있노라고 했다. 그런 마당에 이제는 집안의 죄인으로 돌아갈 수도 없단다. 결국 둘을 앞뒤를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듯 그 길로 의기투합하여 개밥바라기가 희미하게 밝히는 길을 따라 손에 손을 잡고는 동네를 뜨고 말았다.

처녀는 기가 막혔다. 동네 처녀와 사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앞날이 캄캄한데 신랑이란 작자가 무책임하게 배 맞은 여인이랑 야반도주로 종적을 감추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남은 삶이 허황하다. 그나마 얼마간을 제 정신으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시부모가 한 목소리로

“새아가 분하고 원통해도 참는 자가 최후에는 이기느니라! 누가 무어라 하건 간에 네가 우리 집 맏며느리이자 진짜 며느리니라! 덜 떨어진 남정네들이란 눈앞에서 질질 짜는 여자가 이쁘다고, 가엽다고 난리굿을 피워 봐도 콩깍지가 벗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생시처럼 돌아오느니라! 그때는 네 마음속이 후련하도록 복수를 하거라!”하며 한결같이 신임을 하는 때문이었다. 하지만 얼마 후 둘의 소식을 접하고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하기는 둘이서 딸을 놓고는 잘 살고 있는 소문에는 부모로써 어찌 아니 그러겠는가? 게다가 동네 처녀 집안에서도 어떻게 소문을 접했는지 그간의 악연을 끊으려는 듯 닭을 잡아 안주로 삼고 정종을 화해 주로 찾아왔다. 전날 같으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 처녀의 눈앞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다. 부엌을 나오다가 얼어붙은 듯 문설주에 기대서서 보는데 눈앞이 아찔하다. 어떻게 방으로 왔는지도 모르게 방으로 돌아온 처녀가 방문에 바싹 귀를 붙여 바깥의 동정을 듣고 앉았는데 절로 맥이 풀린다.

“사돈 그간의 안 좋은 기억을 다 잊고 우야든지 제 여식을 어여삐 보아 주이소!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계집아이가 서 서방만 믿고 집을 나가 객지 생활에 얼마나 외롭고 힘들겠습니까? 게다가 아이까지 낳았다는 소식에 불쌍해서 못살겠어요!”하고 눈물을 찔끔거려 고개를 숙이자 기다렸다는 듯

“예~ 저희라고 뭐가 다르겠습니까? 어리보기로 세상물정이 어둡기야 그놈도 만만치가 않지요! 한데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손녀에 핏줄까지 보았다는데 애달기로 말하자면 우리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습니다.”하고 반기는 말속에는 긴 기다림 끝에 맞이하는 그리움이 흠뻑 베어난다. 일부러 귀를 기울려 들을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듣고 싶지 앉아 솜으로 양 귀를 틀어막고 양 손으로 짓눌러도 또렷하게 들린다. 기다란 대꼬챙이로 쑤셔 박아오는 듯 또렷하다.

담벼락은 가는 세월이 깃들고 좀이 쓸 듯 물이 스며드는 끝에 무너지고, 지붕을 떠받히는 대들보는 속절없는 시간 속에 흰개미가 보금자리를 틀고 연륜에 지쳐 썩어지는 통에 내려앉아 눈으로 볼 수도 있건만 사람의 썩어 문드러지는 가슴은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과 같아 볼 수도 또 알 수도 없구나! 하는 처녀의 애 끓는 마음과는 달리 마당으로부터

“사돈은 손녀가 정영 안 그립습니까? 저는 밤이면 밤마다 외손녀가 그리워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지금이 한창 귀여울 때죠?”

“아마 그럴 겁니다. 그나저나 제대로 먹기나 먹는지...! 얼라 에미가 젖이라도 제대로 돌아야 할 텐데? 시어머니라 있어보았자 미역국 한 그릇 따뜻하게 끓여 줄 수가 없네요! 죄라면 부모를 잘못 만난 죄지 게네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에고 몹쓸 놈의 세월 같으니!”

“그렇지요! 부모들 등살에 저들이라고 별수가 있었겠습니까? 옹알이를 하고 배밀이를 하고...! 눈앞에서는 삼삼하데...! 애간장만 녹아 납니다”

“안 그래도 가는 인편이 있으면 기별이라도 취해 볼까 합니다만!”

“그리만 된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연통이 닿아 씻은 듯 돌아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집 나갈 당시 아~ 그년이 글쎄 얼마나 운짐(운김의 방언으로 남은 기운)이 달았으면 평생을 안 그러더니만 제 딴에는 속이 바싹바싹 탔는지...! 하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뱃속에 든 아이도 있고 해선지 안하던 손버릇이 나와 부끄럽고 무안해 고개를 못 드는지...! 그날 이후 일자 소식 한자 없네요! 돈이야 아비어미가 죽으면 어차피 저네들 건데! 고마 돌아오면 얼마나 좋을 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일이 이 지경인데 인자 우짜겠습니까? 미우나 고우나 자슥인데요!”

“게다가 새마을 운동인가 뭔가 해서 봇도랑을 대대적으로 정비한 탓에 물 걱정도 없는 마당에 더 이상 싸울 일이야 있겠습니까?”

“예~ 그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보모자슥 간에 용서고 머고 따줄게 뭐가 있습니까? 인자 집나간 게네들만 돌아오면 무슨 큰 걱정이 있겠습니까? 오늘 이후로는 앞뒷집으로, 사돈지간으로 지난날은 씻은 듯 잊고 정 나게 살아야지요!”하는데 방안에 앉은 처녀는 눈앞이 샛노랗다. 처음에는 쉬쉬하며 말소리를 죽이는가 싶더니 어느 한순간부터는 아예 들으라는 듯 대놓고 언성을 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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