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63)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63)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2.05.09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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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금줄을 찾지 않아도 절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우렁차다
당최 입을 열지 않으니 알 도리가 없었다
칼부림까지 있어 피까지 본 집안이다 보니 도저히 허락을 받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9월 22일 한가위를 만 하루 지난 보름달이, 디아크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9월 22일 한가위를 만 하루 지난 보름달이, 디아크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아버지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갈피를 못 잡아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방구석으로 내몰린 처녀는 얼굴을 양 무릎 사이에 파묻어 까닭 없는 눈물만 줄줄 흘린다. 천륜을 거스르는 말 때문인지, 방구석에 찌그러져 청승맞게 울며 앉은 딸내미 때문인지 아버지는 답답한 가슴을 잠재울 심산인지 불식간 방문을 여는가 싶더니 ‘쾅’하고는 나가버린다. 처녀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들어 닫혀진 방문을 보건대 설움이 복받친다. 그제야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아버지 어째 그럴 수 있습니까? 그리는 못합니다. 이대로 생과부가 되어 늙어 죽어 죽는다 해도 그리는 못합니다. 내 뱃속에 든 이~ 애가 어째 제 동생입니까? 제 아들이지요!”라고 외쳐보지만 듣는 사람이 없어 빈 방에 공허하게 떠돌 뿐이다. 메아리로 돌아오는 건 이 모두가 너의 행복을 위해서란 아련함 밖에 없다. 당장 동네 사람들이

“그 무슨 천륜을 거스르는 짓인가? 천벌을 받지!”하고 수군거리겠지만 훗날에는 옳은 결정이라 다들 이해할 것이란다. 그런 가운데 배는 점점 불러왔고 산일을 맞아 출산을 하고보니 아들이다. 얼굴이 달덩이 같이 훤한 것이 떡두꺼비 같은 아들이다. 밥술은 건너 뛴 적은 없더라도 그간의 온갖 구박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듣고 입에 물리도록 먹은 아기답지 않게 둥글둥글 잘도 생겼다. 어미의 고단한 삶은 능히 알았는지 문고리를 휘감아 늘어진 광목천자락을 부여잡은 처녀의 힘 몇 번에 입안의 대추씨 내뱉듯 불쑥 나와 버린다. 탯줄을 끊자마자 자리가 빈 아버지를 찾는지 첫 울음이 지붕이 들썩일 정도로 우렁차다. 동네 사람들이 대문을 기웃거려 애써 금줄을 찾지 않아도 절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힘차다. 세상에는 비밀이란 없다고 항변이라도 하는 양 하늘에 닿을 듯 떠들썩하게 운다. 아기의 울음소리로 인해 이미 다 알아버린 마당에 무얼 숨기고 자시고 할 것인가? 대문에 붉은 고추와 숯이 뜨문뜨문 꽂힌 금줄이 다음날로 가로질러 쳐진다.

그즈음 또 다른 처녀는 시집으로부터 자그마한 보따리 하나를 전해 받는다. 물 한 잔조차 얻어먹기가 부담스럽다는 인편에 의해 전해진 보따리는 보따리라기보다 조금 큰 복주머니처럼 앙증맞다. 이미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가족이 보는 앞에서 풀어보니 역시나다.

보따리 안에는 날이 선 가위로 자른 듯 반듯하게 잘려진 옷고름 하나와 얼마간의 재화가 들어있었다. 잘려진 옷고름을 보는 처녀는 차마 못 볼 것을 본 듯

“못 된 놈!”하고 어금니를 앙 다물어 씨부렁거리는 중에 설움에 겨운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오지랖이 흥건하게 젖도록 운다. 처음에는 어깨를 들먹이는가 싶더니 조금 지나자

“어이구! 아버님 어머님 이대로 저를 버리십니까? 맏며느리라 복스럽다며 다정하게 손을 잡을 때는 언제고 이토록 매정하게 내치십니까?”하고 동네가 떠나가라 대성통곡이다. 지금껏 죽은 듯 지내온 것과는 딴판으로 절절히 흐느낀다. 목이 잘려 나가는 듯, 가슴이 뚫어져 홍수가 난 듯 울음 운다. 그때만큼은 처녀의 부모도 말을 잊은 듯 딸내미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사사건건 나무라던 때와는 달리 실컷 울도록 내버려 두고 있었다. 아니 속에 든 모든 앙금을 시원하게 게우도록 울어라! 울어라 부축이고 있었다. 이제 만사가 다 끝났다 여기고 있었다. 지난 세월로 보아 차라리 잘 되었고 홀가분하다 여기고 있었다.

보따리에 든 잘려진 옷고름은 이승에서의 인연은 이쯤에서 끊자는 시어머니의 것으로 보였고 재화는 처녀가 혼례 때 해간 혼수를 보상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유 여하를 떠나 시집에서 파혼을 통보 받는 입장에서 어찌 아니 울 수가 있겠는가? 그나마 일말에 양심은 있는지 헌 혼수품 대신으로 분에 넘치는 금전을 보내왔다는 것이다. 울컥울컥 꾹꾹 목구멍으로 눌러 처녀가 울음이 멈추기를 기다려 아버지는 재화를 들어

“임자가 알아서 빚이나 갚고 나머질랑 남겨 두었다가 이년 팔자 고칠 때 보태시구라!”할 때

“그래 이 날수록 질질 끌더니만 결국에는 이렇게 끝나는가 보구나! 다 못난 네 팔자려니 해라! 그간 이 아비어미가 미웠겠지만 어쩌겠나! 다 네가 시집으로 들어갔으면 하고 그랬지 딴 뜻이야 있었겠나! 이제는 이도 저도 틀려 버린 것, 네 마음이나 얼른 추스르거라!”하는 어미의 말을 끝으로 미운털이 다소 나마 지워진다. 하지만 처녀의 마음은 더 외롭고 허전하기만 하다. 허허벌판에 홀로 내 던져진 느낌이다. 그간

“못 된 놈!”하고 입에 익어 달고 다니던 말만 뱉을 듯 말 듯 우물거린다. 이는 처녀가 시집을 떠나 친정으로 돌아오고 난 이후 줄곧 혼자서 중얼거린 말이기도 했다. 대상이 누구인지 자세히는 모른다. 이유를 알고자 좋은 말로 구슬러도 보고 윽박질러도 보았지만 당최 입을 열지 않으니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친정에서 있는 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짬이 있을 때마다 토막, 토막씩 내뱉는 말을 들어서 얼추 내막을 추리할 수가 있었다. 처녀의 입으로부터 튀어 나온 동그라미, 네모, 물음표, 마침표, 이분음표, 세모, 마름모, 높은음자리표 등등을 퍼즐을 맞추듯 하나하나 가지런하게 맞추자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드러난다.

대처로 시집을 간다는 부모의 말에 처녀는 가슴이 들떴다. 매파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었겠지만 먹고살 만하다는 데 희망을 걸었다. 보릿고개 때 최소한 밥은 굶지 않는다는 데는 딱히 반대할 까닭이 없었다. 하지만 대처에서 산골 처녀에게 과분한 조건을 내걸어 혼담을 넣을 때는 한 번쯤은 의심도 해볼 만했지만 사람이 좋아 철석으로 믿었다.

마침내 혼례를 치른 처녀가 시집에 들어 첫 날 밤을 맞았다. 신혼의 단꿈에 젖는 것도 잠시, 첫 새벽을 맞은 처녀가 첫 닭이 울기도 전에 일찍이 일어나보니 당연히 옆자리에 누워 있어야 할 신랑자리가 허전하다. 마음 한편으로 섭섭했지만 부지런하여 그런가 싶어 그냥 넘겼다. 하지만 다음날부터는 외박이 밥 먹듯 한다. 그럴수록 시부모는 처녀 앞에서 안절부절 못한다. 처녀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은 신랑을 잡아 앉혀 왜 그러느냐고 하소연해도 소용이 없었다. 돌아오는 건

“시집 온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바가지에 없는 여자를 들먹여 투기를 하는 거야!”하는 애먼 말 뿐이다. 답답한 마음에 시부모께 여쭈어 봐도 신통치가 않다. 그렇다고 가만히 손을 놓고 있기에는 미심쩍은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처녀가 며칠간이나마 안면이 있는 동네 사람들을 상대로 이리저리 수소문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미 동네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이라 처녀가 내막을 알고자시고 할 게 없었다. 수일 내에 자세한 내막을 접한 처녀는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날 이후부터 처녀는

“못 된 놈!”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처녀의 신랑은 처녀와 혼담이 오가기 이전부터 동네 처녀와 밀애를 즐기고 있었다. 문제는 그들의 두 집안이 원수지간처럼 앙앙불락하는 데 있었다. 양가의 집안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캐풀렛 가’와 ‘몬타규 가’와 다름없다는 점이었다. 소설처럼 살인까지는 아니더라도 과거의 어느 날에는 칼부림까지 있어 피까지 본 집안이다 보니 도저히 허락을 받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두 집안이 이렇게 된 것은 봇도랑을 타고 쫄쫄쫄 흘러드는 논물 때문이었다.

비라도 흡족하게 내리는 봄은 그럭저럭 문제가 없었다. 한데 가뭄이 심한 때의 모내기 시기에는 두 집안은 두 눈에 불을 켰다. 두 집안의 논이 봇물의 맨 끄트머리에 나란히 있는 것도 문제의 원인이었다. 본래도 쫄쫄거리는 봇도랑 물이 마지막에 이르고 보니 풍족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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