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옛지명을 찾아서] 월배
[사라진 옛지명을 찾아서] 월배
  • 권오훈 기자
  • 승인 2022.02.04 1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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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계곡을 비춘다는 월배는 넓은 지역 아우러
무릉도원을 닮았다는 도원동의 수밭마을은 맛집거리로 변모
샘에서 용이 승천한 진천동의 미리샘, 새각단, 나분들, 한실은 잿빛 아파트숲으로 변해

 

월배는 달서구 전 지역 중 서부 정류장 남쪽 지역 전체를 아우른다. 1980년대만 해도 남구 대명동과 달서구 성당동을 지나면 만나게 되는 너른 들과 산재한 자연마을을 포함한 넓은 지역이었다.

월배라 불리는 데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상인동의 동쪽에 위치한 대덕산과 동남쪽에 위치한 청룡산 줄기 사이의 계곡은 골이 너무 깊어 달이 뜨면 달빛이 계곡을 비춘다 하여 ‘달ᄇᆡ골’이라 불렀다. ‘달배골’로 변했다가 다시 현재의 지명인 ‘월배’가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다른 하나는 등 뒤에서 달이 뜬다고 해서 달 월(月) 등 배(背)의 한자어, ‘월배’라고 부르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다.

삼필봉에서 바라본 월배지역의 모습, 우측에 학산이 보이고 전역이 아파트로 숲을 이루었다. 권오훈기자
삼필봉에서 바라본 월배지역의 모습, 우측에 학산이 보이고 전역이 아파트로 숲을 이루었다. 권오훈기자

 

2013년 12월 7일 월배 지역 발전협의회에서 ‘월배 유래비’를 달빛 고운 월광수변공원에 세웠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월배라는 명칭은 대덕산과 청룡산 사이의 밝은 달빛이 비치는 그윽한 골짜기를 ‘달ᄇᆡ골’이라 하였으며, 달ᄇᆡ는 달배가 되고, 다시 한자화 되면서 월배(月背)로 바뀌었다.

상화로에서 바라본 달비골 전경, 왼쪽의 대덕산과 오른쪽의 청룡산 줄기 사이에 있는데 깊은 골짜기가 아파트에 가려졌다. 권오훈기자
상화로에서 바라본 달비골 전경, 왼쪽의 대덕산과 오른쪽의 청룡산 줄기 사이에 있는데 깊은 골짜기가 아파트에 가려졌다. 권오훈기자

 

대덕산과 청룡산에서 뻗어 내린 크고 작은 구릉과 하천이 낙동강 변의 넓은 평야와 어우러져 사람 살기가 더없이 좋았다. 달비골에서 흘러나온 물길이 논밭을 채워주었고 여느 지역 못지않게 선사시대의 유적이 많았으며 국란에는 스스로 일어나 충절을 다하였다.

신라 시대 월배(月背)는 위화군(喟化郡)의 설화현(舌火縣)에 속한 지역이었다. 설화현은 신라 경덕왕 때 화원현(花園縣)으로 이름을 고쳐 수창군(壽昌郡, 가창)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 시대 화원현은 1018년에 경산부(京山府, 성주)의 속현(屬縣)이 되었다가 1143년에 대구 현의 소속이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1394년 성주목(星州牧)에 편입되었다가 1601년에 대구도호부에 소속되었으며, 지금의 월배는 당시 화원현의 8방 중 월배방(月背坊)과 조암방(租巖坊) 지역이다.

이후 월배는 1914년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기존 월배면에 조암면의 대천동, 상동, 하동과 인흥면(仁興面)의 송정동을 편입하여 달성군 월배면으로 재편되었다.

그 후 1958년 다시 대구시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에 성서면의 송현동을 편입하여 달성군으로 환원되었다. 1973년에 화원면의 대곡동을 편입하였으며, 1979년 월배 읍으로 승격하였으나 1981년에 대구시가 직할시로 승격할 때 읍은 폐지되고 월배 1, 2, 3동으로 나뉘어 남구에 속하게 되었다. 지금은 1988년에 신설된 달서구에 속해 있다.

자료수집 및 실무위원으로 김용욱, 김인호, 홍경호, 박상태 제씨가 수고하였고 문학박사인 경북대 김광순 명예교수의 감수를 받았다고 적혀있다.

월광수변공원에 세워진 '월배유래비'의 전면, 뒷면에는 개별 마을의 유래가 간단하게 소개되어 있다. 권오훈기자
월광수변공원에 세워진 '월배유래비'의 전면, 뒷면에는 개별 마을의 유래가 간단하게 소개되어 있다. 권오훈기자

 

뒷면에는 각 마을 이름의 유래가 새겨져 있는데, 지면상 월배 지역 향토문화연구원 이사장이자 달서구 의원이기도 한 김인호 실무위원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도원동과 진천동, 상인동을 상세히 소개하고 나머지는 유래비에 적힌 대로 간단하게 소개한다.

▶도원동(桃源洞) ~ 아름다운 경치가 무릉도원과 흡사하여 도원동이라 하였으며, 자연마을로는 저수지 안쪽의 수밭마을, 마을 앞에 큰 언덕이 있다 하여 붙여진 원덕마을, 저수지 아래 있는 못밑마을 등이 있다. 수밭마을과 원덕마을에는 수령 450년의 느티나무가 있어 오래된 마을임을 알 수 있다. 수밭골은 500년 전 박씨 성을 가진 선비가 정착하여 밭을 일궜는데 숲이 울창하여 추전(萩田)이라 불렸다고 전해져 온다. 이 마을에서는 느티나무와 수변공원에 옮겨놓은 거북바위에다 매년 정월대보름에 동제를 지냈다고 한다. 도원지 주변이 월광수변공원으로 개발되면서 사람들이 많이 찾게 됨에 따라 마을은 오래된 슬레이트와 기와지붕 일색이던 시골집이 하나씩 헐리고 깔끔한 건물의 식당과 카페가 들어서면서 맛집 거리로 변모하고 있다. 저수지 아래 원덕마을은 롯데 캐슬레이크와 서한 이다음레이크뷰 등의 아파트촌으로 변모하였고 느티나무가 있는 소공원에 ‘원덕어린이공원’이란 안내판과 허름한 가건물의 경로당만이 유일하게 흔적으로 남아있다.

수밭마을은 맛집거리로 변모되고 있다. 권오훈기자
수밭마을은 맛집거리로 변모되고 있다. 권오훈기자
못아래 원덕마을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서고 원덕소공원에 450년 느티나무만 남아있다. 권오훈기자
못아래 원덕마을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서고 원덕소공원에 450년 느티나무만 남아있다. 권오훈기자

 

▶진천동(辰泉洞) ~ 마을에 있는 샘에서 용이 승천하였다는 전설로 진천이라 하였으며 자연마을로 용천(龍泉, 미리샘)동, 나분들, 새각단, 송정 등이 있었다. ‘나분들’은 성곽이나 관아 건축 등 나라의 공사를 위해 공출했다가 용도가 없어지는 바람에 그 자리에 ‘널브러져 있던 돌’을 뜻한다. ‘새각단’은 ‘새로이 조성한 마을’을 이르는 말로 새터, 신정(新定)이라고도 했다. 이 두 용어는 사전에는 나오지 않으나 영천시 고경면과 울주군 온양읍, 경산시 갑제동 등에 새각단길이 있고 계룡시 엄사면에는 나분들길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지명으로 많이 쓰이던 옛말로 추정된다. 이 지역은 온통 잿빛 아파트 숲으로 변했다. 진천동에서는 선사 유적(입석)도 발굴되어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진천동에서 선사유적이 발견된 것을 상징하는 커다란 선사인물의 상반신 와상이 대로변에 조성되었다. 권오훈 기자
진천동에서 선사유적이 발견된 것을 상징하는 커다란 선사인물의 상반신 와상이 대로변에 조성되었다. 권오훈 기자

 

▶상인동(上仁洞) ~ 17세기까지 우귀리(尤貴里)라 했던 상인동은 ‘어진 이들이 사는 마을’이라고 하며 자연마을로는 월촌, 채정, 달비, 구매 등이 있었다. 달서구청 맞은편에 있는 낮은 산의 모양이 학 모양이라 학산이라 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무근이다. 김인호 위원에 의하면 현재의 상원고(옛 대구 상고) 자리를 ‘도도뱅이’라 불렀는데 큰 못이 있었다. 그 못에는 우렁이(골뱅이)가 많이 서식하여 학의 먹잇감으로 적격이었다. 인접한 산에 재래종 소나무가 많아 300~400여 마리의 학이 날아들어 장관을 이루었으므로 ‘학산’이라 불렸으며 당시 지역에 유일한 학교였던 월배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의 주된 소풍 장소였다. 고학년은 달비골에 있는 임휴사로 소풍갔다.

그밖에 골이 깊고 큰(한실) 대곡동(大谷洞), 큰 샘이 있는(한샘) 대천동(大泉洞), 소나무가 많은 고개(솔고개) 송현동(松峴洞), 월배와 달성에서 한 글자씩 따온 월성동(月城洞), 월배와 조암에서 한 글자씩 따온 월암동(月岩洞), 마을 옆으로 연중 맑은 물이 끊임없이 흐르는 내가 있는(흐른 내) 유천동(流川洞)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이 지역의 특성을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