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나의 그때 그 시절] 이종환 경북대 명예교수 ①초등학교 시절
[남기고 싶은 나의 그때 그 시절] 이종환 경북대 명예교수 ①초등학교 시절
  • 시니어每日
  • 승인 2021.08.30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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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환 교수는 1953년 출생
경북대학교 인문대학 일어일문학과 명예교수
대구사회문화대학 부학장
1960년 4월 부산 영도 영선 초등학교 입학 기념 사진. 1학년 11반 학생수 84명

반세기 전의 이야기를 하자면 왠지 케케묵은 老客(노객)이 내뿜는 푸념처럼 들리겠지만, 그래도 글로 남기고 싶은 유혹은 떨칠 수가 없다.

그때 그 시절!

옛 기억을 더듬어 가다 보면 지난 50여 년 세월이 마치 신비스러운 空想科學映畵(공상과학영화. fantasy film. SF영화)의 한 장면이 뇌리를 스쳐 가는듯하다. 한마디로 지난 50여 년간 우리나라는 桑田碧海 (상전벽해)라 할 만큼 탈바꿈을 했다.

나는 1960년 4월에 부산시 영도구 소재의 영선초등학교에 입학했다.바로 그달에 4•19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고교생 수백 명이 짝을 지어, 어깨동무를 한 채 고함을 지르면서 신작로를 이리저리 달렸다. 우리 동네 파출소가 수난을 당했다. 어린 마음이지만 무슨 큰일이 난 것을 직감했다. 해동 고등학교 학생인 동네 형님도 그 시위에 참여했다.

그다음 해, 1961년에는 5•16이 일어났다. 영선초등학교 교정 안에는 군인 아저씨들이 가득 들어와 있었다. 학교 근처 남항시장 입구에는 평소 지게꾼 아저씨들이 즐비했다. 당시의 청년층에게는 마땅한 직업이 없었다. 지게 하나로 무거운 쌀가마니를 멀리 짊어다 주고 그 품삯으로 겨우 연명해 가는 실정이었다. 비라도 오는 날에는 일거리가 없어서 굶기도 했다. 노가다 판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비 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다. 굶기를 밥 먹듯이 하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그 시장 입구에 군용 트럭이 다가왔다. 열 명 남짓한 군인들이 갑자기 들이닥쳐서 그곳에 모여있는 동네 아저씨들에게 총을 겨누었다. 곧 그 아저씨들은 어떠한 저항도 할 겨를도 없이 군용차에 실려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니 군사혁명에서 실시한 사회정화 운동이었던 것 같다.

6.25때 부산 판자촌

 

영도 蓬萊山(봉래산. 일명 고갈산) 중턱에는 「재건」이라는 큰 구호가 새겨졌다. 그곳은 피난민촌이다. 1•4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온 피난민들 상당수는 거제도 수용소를 거쳐서 영도로 몰려들었다.

나의 학급 친구 중에는 월남인 2세가 많았다. 피난민촌은 하나같이 판자촌이다. 나무 판데기를 사방으로 이어서 급조한 집이다. 방안 벽은 신문으로 도배를 한다. 지붕은 허름해서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도 날아갈 정도이다. 한 번씩 대형화재가 나기도 했다.

피난민촌에는 제대로 된 화장실도 없었다. 아직 수도 시설이 없어서 물 사정이 넉넉지 못했다. 동네 아낙네들은 이른 아침부터 샘에 물을 길러러 가는 게 일상이었다. 특히 물이 귀한 시절이었다. 나날이 물과의 전쟁이었다.

그 당시 가난한 삶을 문자로는 다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영양 부족으로 얼굴에는 마른버짐이 군데군데 퍼져있었다. 소매 끝자락은 코를 문질러서 반질반질하다. 겨울에는 너무 추워서 손등이 거북등처럼 갈라지곤 했다. 손발이 틀어 갈라진 곳에 글리세린을 발랐다.

內衣(내의) 목덜미 부근에 이(蝨•슬)가 자주 나타났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엄지손톱이 재빨리 움직였다. 한더위에는 웃통을 벗고 등물을 치면서 더위를 달랬다.

저녁을 먹고 나면, 어머니는 부엌방에서 큰 대야의 따뜻한 물속에 우리 5형제들을 차례로 담그고는 목욕을 시켜 주셨다. 맏이가 입던 옷은 동생들에게 대물림했다.

씹다가 만 껌을 방안 벽에 붙여놓으면 형제들끼리 번갈아 가면서 씹었다.먹다가 만 가루 감기약도 무슨 별미인양 동생들은 약 종이가 다 닳도록 혓바닥을 갖다 댔다. 잠을 자다 보면, 길 잊은 쥐가 내 머리를 밟고 지나가곤 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바로 전 년, 1959년 9월 추석날, 사라호 태풍이 부산을 강타했다.그날 명절 제사를 지내려고 대신동 큰집에 가는 길이었다. 어린 내 눈에도 사라호 태풍 피해가 심했다. 영도 함지골 바닷가 절벽에서 낚시업을 하는 주인 남자가 큰 파도에 실려서 바다 멀리까지 떠내려갔다. 그리고는 그 큰 파도에 다시 되밀려서 본래 자리에 되돌아왔다는 우수꽝스러운 童話(동화) 이솝이야기가 퍼졌다. 이렇게 바다 파도 소리는 낭만을 노래한다.

학교에서는 매 학기 기생충 검사를 했다. 성냥갑에 변을 넣어서 제출했다. 동네 목욕탕은 명절 때에나 갈 수 있었다. 사회 시험에 목욕은 며칠 만에 하는 게 위생적인가 하는 문제가 나왔다.

연필을 아껴 쓰려고 다 쓰고 남은 몽당연필에 침을 발라가면서 공책에 쓰기를 했다. 점심시간에는 담임 선생님이 쌀과 보리 혼식 장려책으로 도시락 검사를 하였다. 여름 방학 숙제 또한 그 시대상을 반영한다.

파리를 잡아서 성냥 통에 담아 오기. 쥐 꼬리를 3개 이상 가져오기. 9월 학기가 시작되면, 교실 뒤편에는 파리통이 산처럼 쌓여있다. 하루 이틀 지나면 똥파리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담임 선생님은 파리통을 많이 가지고 온 순서대로 성실성과 근면성을 평가한다. 아주 비위생적이다. 오늘날 같으면 큰 뉴스감이다.

파리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똥파리. 왕파리. 순경 파리. 집파리, 검정파리, 금파리, 초파리, 나방파리, 쉬파리, 벼룩파리 등이 있다. 초등학교 동기생 중에는 파리 별명을 지닌 친구가 있었다. 지금 그 친구의 이름은 가물가물하지만, 그 친구 별명인 똥파리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운동회 날에는 아주 용감한 친구였다. 기마전을 하면 그 친구의 등에 내가 올라탄 채 상대편과 힘겨루기를 한다. 그 친구는 힘도 세고 용감했다. 기마전이 끝나고 보니 그 친구의 얼굴에는 푸른 멍 자국이 있었다. 모두가 그립다.

대구사회문화 대학의 원로 박성호 교수님의 전공은 야생파리에 관한 연구이다. 日本 東京大(일본 동경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셨다. 박 교수님은 학계에서 파리 박사로 통한다. 당신의 눈앞에 나타난 파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잡아서 연구 표본으로 삼는다. 즉 파리 헌팅 킬러(hunting killer)이다. 그 시절 파리는 우습게도 인간에게 또 하나의 일자리를 제공해 주었다. 박 교수님은 요즘 파리가 박멸되어 당신의 전공 분야가 축소되는 것을 걱정하고 계신다.

그 당시 아침저녁으로 밥 구걸하는 거지가 많았다. 어느 날 넝마주이 아저씨가 우리 집 마당 빨래 걸이에 널려있는 빨래를 집게로 집어서 넝마 통에 넣는 것을 보았다. 재빨리 엄마에게 일러주었다.

-엄마 엄마! 저 아저씨가 우리 집 빨래를 다 걷어간다.

-못 본척해라! 그 아저씨 집에도 가족이 있다. 배가 고파서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죄가 아니다. 모르는 척해라!_

그날 어머니가 일러주신 인생 교훈은 평생 명심보감이 되었다.그때는 모두가 가난했기에 서로 간에 同病相憐 (동병상련)의 따뜻한 인정을 가졌다.

한 학년이 20반 정도로 학생 수가 많았다. 교실이 부족하여 수업을 2부제로 나누어서 했다. 우리 반 학생은 약 80명 정도였다. 그러니까 전교생의 숫자가 약 1만 명에 가까웠다. 학급 친구 중에는 공부보다는 점심때 학교에서 배급해 주는 옥수수 떡을 먹으려고 학교에 오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6학년 졸업이 다가와도 자기 이름도 제대로 못 쓰는 친구도 있었다. 6학년 때 중학교에 진학 못 하는 학생을 위한 실업반을 운영했다. 자전거 타기. 리어카 끌기. 구두 닦기 등을 실습했다.

이종환과 동생.  판자집을 배경으로

점심시간 때 도시락을 못 가지고 온 친구를 위해 도시락 밥통 뚜껑을 연 채 젓가락으로 십자가를 긋고서는 교실 밖으로 나가곤 했다. 그러면 친구 4명이 나누어 먹는다. 어린 시절이지만 밥 구경을 제대로 못 한 친구에게 따뜻한 마음이 나에게 있었던 모양이다. 세월이 흘러서 경북대 교수로 재직할 때, 어머니가 나의 연구실에 찾아오셨다. 그때 초등학교 시절의 도시락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머니께서는 그때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밥 굶는 친구를 위해 도시락을 2개 싸 주었을 것인데 하면서 아쉬워하셨다.

어머니는 유난히 인정이 많은 분이셨다. 아침 식사에는 일부러 밥 한 공기를 별도로 마련하신다. 아침 식사 동냥 오는 아주머니를 기다린다. 그 아주머니가 며칠간 보이지 않으면, 무슨 탈이라도 났을까 하면서 걱정을 하신다. 그리고 병이라도 나면 집에 있는 약을 챙겨주곤 하셨다.

이종환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