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경산시의회 의장 이천수, 그의 꿈을 엿보다
전 경산시의회 의장 이천수, 그의 꿈을 엿보다
  • 유무근 기자
  • 승인 2021.05.28 1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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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지방선거에서 역대 최다 득표를 획득한 인물

이천수(전 경산시의회 의장) 건축사  업무 중 잠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유무근 기자

절망의 한가운데서 꿋꿋한 의지로 희망을 피워낸 이천수 전 경산시의회 의장의 일대기 영상 인터뷰를 보고 감동한 적이 있었다. 경산시 소재 이천수 건축사 사무소를 예방했다.

첫인상이 최경환 전 국회의원을 연상케 하는 풍만한 체격과 인품에 역시 의장감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마스크 끼세요!”란 첫마디에 기선 주도를 놓쳐버렸다.

장시간 면담하면서, 금전이 오가는 광고성 신문 구독은 부정적인 견해에 필자가 공감하여, 광고 국장 수식어가 있는 필자가 주객이 전도되어 빈손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꿈을 그리고 있는 그에게는 동상이몽(同床異夢) 이었다.

◆ 이천수에게 경산은 어떤 의미인가?

경산은 태어나고 자랐으며, 학교 다니고 사업장이 있고 가정이 있는 어머니 품속 같은 곳이라고 한다. 그는 지난 2014년 지방선거에서 중방동, 서부 2동, 북부동, 압량면의 6만 2천 명을 지역구로 역대 최다 득표수를 획득하였다. 그는 시의원 선거, 시장 선거, 국회의원 총선 등에 출마한 경력이 있어 선거전에 ‘부비트랩’까지도 염두에 둔 원칙론자이다.

◆ 의장 임기 2년 동안 무슨 일을 했나요?

- 경산 인구 26만, 13명 시의원 선출, 비례대표 2명, 총 15명 내에 40대에서 70대까지 연령분포가 다양하다. “정치인은 유권자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면 정치 생명은 끝이다”라는 그의 정치 철학을 분석해 보자.

정치는 밑에서부터 시작한다. 저소득층과 장애인, 묵묵히 살아가는 경산시민들의 아픔과 애로사항을 먼저 챙겨주려 했다. 경산시의 1,100명 공무원이 품은 애로점도 챙기려 노력했다. 집행부 공무원들이 능동적으로 열심히 일하게 채찍질도 했다. 질책만 하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경산시는 국책사업이 많아 내려오는 국비를 시의 매칭 사업으로 지원되도록 예산을 꼼꼼히 챙겨왔다. 희망찬 미래를 여는 새로운 기초 자치의 회상 수립을 위하여 경산시민을 위한 의정을 펼치고자 했다. 의회 운영도 조화롭게 원만히 하려고 했다. 잘 조화롭게 원만히 의회를 운영하고, 집행부에 대한 감시와 견제의 기능에 온 힘을 다했다. 지역민들이 원하는 바를 꼼꼼히 챙기려 노력했다는 평을 받았다.

◆ 이천수 주머니를 털어보니 엄청난 인맥 부자였다

전화기에 전화번호 3천 명이 저장되어 있다. 그분들을 자나 깨나 늘 생각하고 때에 따라 안부를 물으며, 정치하던 시절은 물론이고 은퇴 후 다시 생업 현장에 나왔을 때나 늘 힘이 되는 분들이다.

◆ 3가지 색 의미 키워드 몇 가지로 이천수를 엿보다.

* 노란색에는 – 절망

나는 1살 때 소아마비를 앓은 장애인이다. 돌을 지나고도 앉아서만 놀아야 하니 너무 슬펐다.. 3살 때 한의원에서 소아마비 진단을 받았는데 어머니가 충격으로 돌아가셨다. 젖도 제대로 먹지 못해 아버지가 동냥젖으로 키웠다. 일곱 살 때 정월 대보름날, 어느 아주머니가 이불 보따리를 들고 오셨다. 새어머니였다. 그 후 4년 동안 가정 살림이 아주 어려웠고 중학교 3학년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사춘기에 조실부모하고 새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새어머니마저 마흔 대에 돌아가셨다. 새어머니는 혼자서 아들 오 형제를 키우셨다. 내게는 잘하셨다. 세 분의 어버이를 어린 나이에 다 여읜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 같은 비극적인 청소년기를 보냈다. 어렵고 힘든 시기를 통과해야 하는 시험을 목표와 열정으로 이겨냈다.

* 하늘색에는 – 가족

어려운 환경에서 대학원까지 나와 공학석사를 따고 객원교수, 건축사 자격시험, 경산시의원 2선 역임했다. 가족의 힘으로 가능했다. 부모님은 가셔도 위로 네 분의 형님들이 힘이 되었다.

그분들 덕분에 막내로서의 이천수가 오늘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큰형님은 대구스타디움 인근 대구자연과학고등학교 토목과를 졸업하셨고, 시골 살림이 빠듯하니 공무원 시험을 쳐서 공직생활을 하시면서 경산 군청에 근무하셨다.

둘째 형님은 경북대 졸업 후 1964년 사법고시 합격 후 판사로 재직하셨는데, 동생을 공부시키기 위하여 법복을 벗으신 것을 나중에 들었다.

셋째 형 넷째 형까지 동생을 생각해 변호사 개업을 하셨다. 그렇게 제 학원비와 대학 4년 학비를 부담해 주셔서 오늘의 이천수가 있을 수 있었다.

부모가 시켜주는 공부는 힘들면 중도 포기하고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지만, 형제가 공부를 시켜주니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힘들어도 잘 된 모습을 보여 주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형님에게 고맙다며 해외여행이라도 한 번 시켜드릴까 했더니 “ 됐다. 너 잘살면 되지” 하시면서 사양하셨다.

* 분홍색에는? - 희망

“절망의 반대 단어인데, 어릴 때 한 점 빛이 안 보일 만큼 절망스러운 순간에도 늘 생각했다. "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늘이 날 시험한다고 본다. 고통과 절망스러운 순간이 지나면 분명히 좋은 선물을 주려고 시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맹자께서도 말한 바와 같이, "사람이 될지 안 될지는 굶주림을 주고 그것을 시험해서 될지 안 될지를 보아 그 그릇을 만든다"라고 했다. 아무리 어렵고 괴로워도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원동력이 희망이었다.”

 

시 의원 건축사, 경산시의회 의장 명판 앞에서 자세를 취하는 이천수 전 의장.  유무근 기자

◆ 이천수에게 리더는 어떤 의미인가?

“희망을 안겨주기 위하여 정치를 시작했다. 리더의 의미는 희망을 주는 사람이라고 본다. 희망을 못 주면 정치인으로서의 생명은 끝난다. 남들이 해서 하는 게 아닌, 어떤 철학을 갖고서 유권자에게 무엇을 주고, 나를 통해 어떻게 투영이 되어 내 인격이 그들에게 희망으로 비칠 수 있는가? 그게 리더다”

리더의 보물 상자는 가정 앨범이다. 결혼을 39세의 늦은 나이에 했다. 늘 미안한 마음이 있다. 가족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엔도르핀이다. 가족사진은 항상 벽에 걸려 있다.

건축사이며 전 경산시의회 의장을 대면하고, 결과는 비록 빈손이지만 베들레헴 동방박사들이 빛나는 별을 발견한 것처럼, 팔공산 정기(晶氣)를 받은 것 같아 기분은 쾌청이었다.

리더는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혼탁해진 정치판에 정치꾼이 아닌 정치인의 울림으로 다가왔다.

◆ 이천수는

1956년 08월 10일생.

1976년 경산고등학교 졸업

1982 영남대 건축공학과 졸업

1988 영남대학교 대학원 건축공학과 공학석사 학위취득

1993 건축사자격시험 합격

대구한의대학교 건축과 객원교수 역임

현흥초, 경산 중고등학교 총동창회장 역임

현)예공 종합건축사사무소 대표 / 건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