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 (71) 역학(疫學)조사와 어휘강박증, 그리고 언어정책
[말과 글] (71) 역학(疫學)조사와 어휘강박증, 그리고 언어정책
  • 조신호 기자
  • 승인 2020.12.14 12: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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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은 <코로나-19>로 점철되는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지금 이 시각에도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두려움 속에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동안 가끔 언론을 통해서 ‘역학조사’ 라는 용어가 들려왔다. 몇 번 거듭되어도 여전히 ‘역학’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필자에게 쉽지 다가오지 않았다. 뉴스를 들으면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래, 역학(力學)이 아니고, 역학(疫學), 즉 방역학(防疫學)이지!" 라고 공연한 혼란에 빠지곤 했다. 이게 무슨 ‘어휘강박증’인가? 이런 반문은 이 단어가 일상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는 전문용어이기도 하지만,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라는 특성 때문에 그렇다.

우리 사람의 두뇌에는 ‘정보를 통합하고 조직화하는 인지적 개념의 틀이라는 '도식(圖式)’을 가지고 있다. 인지심리학에서 이 도식을 ‘스키마(schema)’라 한다. ‘역학’이라는 용어를 들을 때, 필자가 쉽게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이유는 지금까지 저장된 스키마에 ‘역학’의 의미가 명확하게 새겨지지 않았거나, 비슷한 것이 있어도 쉽게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방송에서 ‘방역학조사’ 라고 하거나, 신문에서 ‘역학(疫學)’이라고 한자를 겸해 주었다면 별 문제없이 바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역학’이라고 하면, 이 낱말의 생소함과 동음이의어의 애매성(ambiguity)이라는 이중 장벽에 막혀서 의미 공백 상태로 잠시 머뭇거리는 것이다. 우리 한글처럼 소리글자에는 이런 동의어의 애매성이라는 단점이 있다. 뜻글자인 중국어에서 ‘疫學(yìxué, 이쉬에)’은 낱말 자체에 의미가 명시되어 있어서 애매성이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防疫學(방역학)은 물론 접두어를 붙여서 免疫學(면역학), 鳥疫學(조역학), 鼠疫學(서역학) 등으로 세분화 하고 있다. 의미 명확화를 위한 조어(造語) 불문율(不文律)이다. 이는 소리글 사용하는 우리가 배워야할 점이라고 생각된다. 의미 명확성이 의사소통의 핵심이므로 그러하다.

낱말은 ‘의미를 연결하는 하나의 연상기호(mnemonic)’이다. 즉 머릿속에 저장해 둔 스키마에서 의미를 불러내는 기호이다. 디지털 시대에 와서 이 기호를 축소하여 print를 pr로 move를 mov로 줄이고, 의미를 형상화한 아이콘(icon)를 만들어 화면에서 마우스를 누른 편리함을 추구하고 있다. ‘농협’, ‘한은’ ‘소확행’ 같은 약자(略字)도 마찬가지다. 의미 연결에 지장이 없으면 된다.

한글사전에 ‘역학’을 찾아보면, 역학에는 ①역학¹(力學; 힘, 운동) ②역학²(力學,학문에 힘씀), ③역학(易學, 주역), ④역학(疫瘧,학질), ⑤역학(疫學) ⑥역학(曆學) 6가지로 정의되어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필자에게 ‘역학’이라고 말하면, ①역학¹(力學)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아마도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되기도 하지만, 가장 먼저 입력되어 스키마를 형성하고 있어서 그럴 것이다.

단어의 의미 파악과 전달은 개별적인 삶뿐만 아니라, 가정, 사회, 국가, 국제 관계에도 아주 중요한 일이다. 동음이의어 문제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이념 분열 시대에 한층 더 중요한 요소이다. 예를 들어서 ‘민주주의’의 의미는 남북한이 다른 것처럼 여야의 정치 진영 따라 집단 스키마가 다르다. 이념 충돌의 핵심이다. 흔히 ‘정치는 생물이다!’ 라고 인식한다. 이는 정치가 유기적인 사고와 행동에서 출발한다는 뜻이다. 정치 진영 간의 의사소통이 어려운 까닭이 여기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모국어 순화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현재와 미래를 좌우하는 정치적 스키마의 공통분모를 확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와 미래의 복지와 발전’에 하나로 통일된 의미를 가지고 전진하지 않으며 조국의 미래는 어두워진다. 그 출발점에 지금까지 놓치고 있었던 것이 최소한의 언어정책이다.

명문화된 규정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앞서 일상생활에서 의미가 명확한 단어를 사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론의 선도하는 언론과 정부 기관이 한 발 앞서서 한글 순화와 의미 명확성을 유지하는 공통분모가 필요하다. 사용자의 편의에 따라서 ‘역학조사’라 하지 않고, 수 많은 청취자들을 위해서 ‘방역학조사’라 하고, 신문에 ‘방역(防疫)’으로 명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배려를 통해서 우리 국민 모두가 하나가 되어 홍익인간의 도리를 다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적절한 언어정책을 새우고 미래를 개척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 한국은 언어정책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정부의 공문서에 불필요한 외래어가 최소화해야 한다. 이를 만들어 내고 시행하는 공무원들이 한글 순화에 앞장서야 한다. 그리고 온 국민이 의미 명확성에 단합이 필요하다. 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극찬하는 우리 한글은 우리가 보호하며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한글은 우리 고유의 문화이고 국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