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58)-군단장 표창
녹슨 철모 (58)-군단장 표창
  • 시니어每日
  • 승인 2020.05.04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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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오후는 군단사령부에서 하기식이 거행된다. 학교로 치면 조회를 하는 날과 흡사하다. 

그날은 군단장이 장사병에게 훈장이나 표창을 주기도 하고 끝난 뒤에는 참모장의 훈시와 꾸중 그리고 기타 공지사항을 전달하는 날이기도 했다. 

어느 수요일 태원이 군단장으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 군단에는 군악대가 없어 이날만은 예하부대에서 군악대를 불러오곤 했다. 군악대가 등장한다는 것은 큰 잔치가 있다는 뜻이다. 군단장 이 취임식 같을 때는 미군도 참석하지만 하기식은 군악대까지만 초청된다. 식이 시작될 때 국민의례가 있고 다음 국기에 대한 경례 그리고 임석 상관에 대한 경례가 이어졌다. 군단에선 삼성장군인 군단장이 최고 상관이 되고 당연히 그에 대한 경례가 먼저 이루어진다. 군악대는 ‘빤빠라 빤빤빠’를 연주하는데 이 음절의 개수가 바로 별의 개수를 말하는 것이다. 이 풍습은 정부에서 하는 모든 행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대통령은 국군통수권 자이므로 그런 사람에게는 원수 대접을 하여 다섯 번의 스타 마치가 울린다. 군단장은 별이 세 개이므로 세 번의 스타 마치가 울려 나온다. 세 개의 별을 단 깃발이 나부끼고 그 깃발을 보고 모든 장사병이 거수경례를 할 때, 침묵 속에 울려 퍼지는 스타 마치의 음절은 사나이의 심금을 울리는 음악소리가 아닐 수가 없다고 태원은 생각했다.

  

                      제 630호 표창장

       제 11군단 대위 우태원 소속 군단 본부대 군번 255958.

위 사람은 군단 의무실장으로서 평소 조국에 대한 헌신과 봉사의 자세로 부여된 임무를 성실히 수행한 모범 장교였음. 특히 이 장교는 사병들의 질병 예방과 치료에 헌신을 다하여 군의 사기를 높였으며, 또한 대민 봉사를 통한 군의 위상을 선양한 공로가 컸음. 이에 건군 제 26주년 국군의 날을 맞이하여 그의 공로를 기리고자 이 표창장을 수여함.

  1974년 10월 1일 제 11 군단장 중장 양봉직

 

 태원이 단상에 오르는데 평소 그가 자주 보던 군단장이건만 이 자리에선 마치 딴 사람처럼 느껴졌다. 태원은 만감이 교차했다. 처음 그가 전방에서 전출 왔을 때 이 사람들에게 받았던 조롱과 멸시가 떠올랐다. 무능한 군의관, 부패한 군의관 등등 생각지도 못한 비난의 소리에는 탈영하고 싶었고 전방으로 다시 돌아가고도 싶었다. 군부독재의 전위 부대에서 근무를 하며 자신과 다른 소리를 듣고서도 거대한 힘에 항거할 수 없어 자신의 목소리를 참고 또 참았던 생각도 났다. 결국은 오늘날이 온 것이다. 보통 간첩을 잡거나 아니면 특별한 공적을 세워야 받을 수 있는 상을 그가 받은 것이다. 보병들로서는 최고의 영광을 느끼는 상이다. 대열 속에선 보병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친구 장기 말뚝 박나 봐”

“상납을 무던히도 많이 했나보지.”

이런 것은 질투 어린 목소리들이다. 태원은 군법회의 때 심판관들이 선고 전에 피고에게 반드시 물어보는 말을 알고 있었다.

"피고는 근무 중 혹시 훈장이나 표창을 탄 적이 있나요?"

이런 질문은 꼭 하고 지나가는 말이다. 그런 사실이 있으면 판결에 도움을 주려고 확인하는 것이다. 피고의 죄가 그만큼 감해지는 것이다. 진급 심사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별 하나에 가산점 0.5점이 따로 붙는다. 별이 세 개면 1.5점이 덤으로 따라가는 것이다. 거의 비슷한 점수로 경쟁이 될 때 표창은 결정적 변수가 되는 것이다. 규정된 복무기간만 지키면 전역할 단기 장교인 태원에게는 이 표창이 단지 하나의 추억거리에 지나지 않겠지만 보병들에게는 크나큰 선물이 되는 것이다.

표창장을 받는 동안 군악대의 감미로운 배경음악이 흘렀다. 군단장에게 경례를 마치고 뒤로 돌아 전 장교에게 거수경례를 하자 함성과 함께 박수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물론 이 소리를 주도한 무리는 항상 그를 따르는 의무실 요원들과 학군단 소위들, 법무부 검찰관 정도였다. 그들이 소리를 내자 일동은 자연스럽게 따라 하게 된 것이다. 평소 같으면 하급 장교들의 이런 파격에 화를 낼 장군들도 이날만은 웃는 얼굴을 해주었다. 어차피 군의관이 보병장교들의 상을 받는 게 파격이었으니 이 날은 예외로 봐주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날 오후 식육식당에서 학군단 소위들의 주도로 축하 뒤풀이가 있었다. 푸줏간 뒤 마당의 평상에 앉아 그들은 소금구이 돼지고기를 안주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형! 결국 해내었군요. 처음에는 저희도 무척 조마조마하였어요. 잘못 하다간 헌병대나 감찰부에서 형의 조그마한 잘못을 소위 비리라고 적발하여 치도곤을 칠 줄 알았죠. 저는 형이 용감하다고 할까 아니면 만용을 부린다고 할까. 하여간 형은 파격적인 행동을 하셨고 결국 승리하신 거예요.”

모두 동의한다는 얼굴로 소주잔을 부딪쳤다.

"형이 하신 공적 중에는 우리가 전부 형에게 포경수술을 받은 사실도 포함될 텐데, 표창장에는 그런 말은 없던데요?"

큰박이 농담 삼아 한마디했다.

"야! ‘큰박’은 형이 호민관이랬잖아. 형은 스스로도 사병의 군의관이라고 자청해왔지. 그리고 모든 사령부 참모들이 오늘 결국 이렇게 손을 든 것도 군단 내의 모든 사병이 형의 편이 되었기 때문이지. 참모들도 이제야 형의 참 마음을 알게 된 거잖아. 형은 항상 약한 자의 편이라고 말해 왔잖아?"

그들은 나름대로 덕담이라고 떠들고 있지만 태원의 마음 한쪽은 기쁨으로 충만하면서도 또 다른 한쪽은 왠지 먹구름이 낀 것처럼 무척도 우울하였다. 그들은 남의 속도 모르고 계속 지껄였다.

"형! 이 참에 평소부터 묻고 싶었던 게 있어요.”

서림이 운을 떼었다.

 "응, 뭔데?"

태원이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형은 군법회의 변호인 하면 일당을 얼마나 받수?”

"그건 왜 물어?”

“딴 게 아니고요. 제가 보안대 있는 동기한테 들었는데요. 법무부 선임 하사인 이 상사가 나쁜 짓을 많이 했대요.”

"나쁜 짓이라니?”

태원이 되물었다.

“진단서 위·변조, 국·배심 결과 변조 등의 수법으로 많은 비자금을 모았대요. 그리고선 그 돈을 법무참모와 법무장교들에게 상납한다는 거예요.”

그는 신이 나서 설명했다. 그제서야 태원은 보신탕집에서 고스톱 칠 때 생각이 났다. 그들이 별 두려움 없이 돈을 잃기도 하고 따기도 했던 장면을 말이다.

"야! 왜 이런 날 그런 이상한 질문을 하냐?”

큰박이 서림에게 면박을 주었다. 그들은 화제를 돌렸다.

"형은 이제 아들도 생기고 표창장도 받고 정말 행복하시겠어요.”

작은박이 태원의 말을 유도했다.

"야! 다 때려치워. 우리 오늘도 불광동 한 번 갈까?"

"왜 그 계집들 보게요?“

서림이 해죽 웃으며 말했다.

“그 계집들 정말 맛있게 보이더니 형도 결국 그 맛을 못 잊는구나?”

이런저런 실없는 이야기를 하다 말고 큰박이 말했다.

“어제 제가 보안대 최 대위를 만났어요. 저한테 두 가지를 묻던데요. 하나는 너희는 매일 군의관 집에서 뭣 때문에 만나느냐. 그리고 만나서 무슨 얘기들 하냐고요.”

큰박은 예하부대에서 온 연락 장교가 아니고 태원과 마찬가지로 사령부 소속으로 부관부에서 훈장, 표창과 장사병 진급문제를 다루는 장교이며 태원의 고등학교 후배였다.

"그리고 또?"

일행은 긴장된 마음으로 물었다. 부대 밖에서는 정부의 언론 탄압이 극에 달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있었다. 많은 기자가 투옥되고 해고를 당했다. 쫓겨난 기자들은 굽히지 않고 그들 자신의 신문을 따로 만들어 길거리나 지하도에서 뿌리기도 하였다. 동아일보에 잔류하고 있던 기자들은 백지 사설을 실으며 정부와 피 마르는 투쟁을 하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동아일보에는 광고가 실리지 않았다. 정부에서 광고주를 협박하여 아무도 그 신문에 광고를 싣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이에 시민들이 참을 수 없다며, 각자 조그마한 광고를 실었는데 그 중에 육군 중위 모모 하는 이름으로 광고가 실린 일이 있다.

아마 보안대가 이런 점에서 태원네를 의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행은 긴장하면서 물었던 것이다.

“두 번째는 형이 형수님과 사이가 좋지 않은가고 물었어요. 전 질문이 말 같지도 않아 ‘아뇨. 그건 또 무슨 말씀이오?’ 하고 되물었더니 그는 ‘아, 그래요. 그래 난 또 혹시 해서 물어본 거요’라고 하더군요.”

“혹시 놈들이 형이 오입한 걸 알고 묻는 걸까?”

'설레발'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가만히 듣고 보니 보안대장과 태원이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태원을 바로 불러 물어보았을 사안들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태원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소주의 취기가 순간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여러 가지로 자신이 관계기관의 주목 대상이며 초점으로 떠올랐다는 의심이 들었다. ‘호사다마라고 득남하고 표창 타고 다음 순서는 남한산성일까.’ 이야기의 방향이 조금 달라지니까 아까 당장에라도 불광동으로 갈 것 같던 무리가 이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어쨌든 조심들 해. 우리가 무슨 잘못이 있어 당하면 억울할 것도 없지만 아무 것도 없이 당하면 그보다 더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어? 더구나 나는 전과가 있는 사람이니까 저들이 여러 가지로 의심을 할 만도 해. 나 때문에 동생들이 다치는 걸 난 보고 싶지 않아.”

태원은 선영과의 관계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쯤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