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54)-생남(生男)
녹슨 철모 (54)-생남(生男)
  • 시니어每日
  • 승인 2020.04.06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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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병주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이 왔다. 전화를 받고 나니 이제 아버지가 되었다는 기쁨보다 왠지 슬픈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왜 그런 감정이 느껴지는지 까닭을 알 수가 없다. 하긴 기쁨이나 슬픔이나 원래는 한 뿌리가 아닌가. 큰 기쁨이 슬픔의 감정으로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파노라마처럼 순간적인 영상이 흘러가고 있었다. 서울에서 처음 만났을 때 볼이 발그레하고 잘 웃던 여고생 병주가 떠올랐다. 대학 다닐 때 식당에서 서울말로 음식을 주문하는 병주에게 화를 내었다. 그 후로 절대 자기 앞에서 서울말을 하지 않던 병주도 떠올랐다. 어느 날인가 미니스커트에 무늬가 있는 스타킹을 신고 멋 부리고 나온 병주의 모습에 찌푸린 얼굴을 하여 병주를 민망하게 하였던 자신의 모습도 생각이 났다. 남산에서의 첫 입맞춤, 임진강변의 첫날밤, 신혼여행 때 해운대에서의 첫날밤 등등 아름다운 추억들이 왜 그런지 눈물 속에 떠올랐다. 자주 가을을 타던 태원이 금년에 또다시 가을의 우울을 앓기 시작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랑의 결실이 맺어진 결과에 대한 기쁨일까? 눈물은 태원의 볼을 타고 내렸다. 오랜만에 고향에 가게 되었다.

“참모장님, 저 대구에 좀 갔다올까 하는데요.”

참모장 박 준장은 대답 대신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제 아내가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겠다는 거야?"

“.......”

이번에는 태원이 말을 잊었다.

"여보, 군의관 당신이 없을 때 장님들이 부르시면 난 어떻게 해?"

“.......”

태원도 그 점 때문에 본부대장보다 계급 높은 참모장에게 찾아온 것이었다.

"의무실은 통신대대 권 대위에게 부탁하겠습니다.”

"그거야 당신 생각이지. 군단장님이 군의관 불렀을 때 낯모르는 통대 군의관이 가면 그 양반 기분이 어떻겠어? 당신은 전번 인사 검열에도 지적을 받은 적이 있잖아? 사병들을 빨리 후송 보내지 않고 의무대에 오래 잡아둔다고 말야?"

“참모장님, 그때도 설명 드렸지만 그 사람들도 규정과 현실이 잘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처럼 작은 의무대에는 환자를 일주일 이상 두지 말고 병원으로 후송하라는 것이 육규에 있지만 그건 미군의 것을 그대로 인용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겁니다. 감기몸살이나 종기 하나에도 치료 기간이 2주일은 걸립니다. 그렇다고 감기몸살로 병원에 후송가면 전부가 웃습니다. 그런 병으로 병원 왔다고요.”

의외로 참모장은 인내심을 갖고 듣고 있었다. 그 사이 둘이 친해진 것도 있고 또 태원의 후원자가 많이 생긴 것도 한 가지 이유가 될 것이다.

“저는 입대 후 한 번도 정식휴가를 간 적이 없습니다. 이번 육본 인사 감사 때 군의관 휴가 안 간 것도 지적되었는데 그건 왜 시정을 안 하십니까?”

태원은 원래 이런 식으로 구차하게 조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친해진 탓에 감히 대위가 장군에게 애교 겸 투정을 부려보는 것이었다.

"그럼 통대 군의관을 책임지고 불러 놔! 장님들이 당신을 찾으면 반드시 연락이 되는 곳에 있도록.”

그제서야 겨우 부대를 떠날 수 있었다. 못 가게 말리는 참모장이 원망스럽거나 밉지는 않았다. 둘이 그만큼 친해졌다는 만족감과 또 자신의 가치가 그만큼 올라갔다는 느낌이 들어 꽤 기분이 좋았다. 군단 내에서 태원의 입지가 넓어지고 신임을 받게 되었다는 안도감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운행된 지 얼마 안 된 고속버스에 오르니 그동안의 우울이 갑자기 사라진다. 학생 때 열차표를 못 구해 고생하던 생각과 서울역 직원들의 건방진 모습만 보다 예쁜 승무원 아가씨들이 사탕을 담은 소쿠리를 들고 방긋이 웃으며 차 속을 걸어 다니며 서비스하는 모습이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다. 마치 비행기 탄 듯하다. 그녀들이 고운 목소리로 주요 지점을 지날 때마다 해설하는 목소리도 좋고 고속도로를 달려 보는 맛이 시골살이 하는 태원으로서는 천당을 느끼게 했다. 이제는 병주와 이름 없는 자신의 아들을 생각해도 슬프지 않았다. 추풍령이 가까워지니 이젠 기쁜 마음이 들었다. 태원의 눈물은 역시 기쁨을 뿌리로 한 감정이었던가 보다고 생각했다. 차장으로 휙휙 지나가는 모습이 황홀하였다. 그러나 이 고속도로의 하행길이 태원의 마지막 귀향길이 될 줄은 그 자신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저 장교님! 저 산의 이름이 무엇이에요?"

느닷없이 옆에 앉아 있는 젊은 여자가 질문했다. 스무 살이 갓 넘은 듯한 앳된 모습이다. 태원이 봐도 이름을 알 수 없는 산이었다.

"나도 모르겠는데요.”

태원은 그의 상념에 방해받은 기분이 들어 약간 귀찮다는 듯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또다시 말을 이어갔다.

“저 혹시 장교님은 소위세요?”

"아뇨. 대윈데요.”

간단히 대답을 하며 그제서야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물론 출발할 때 여자가 옆에 앉았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녀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고 보통 때 차를 타고 옆에 사람이 있어도 말을 걸어보거나 얼굴을 쳐다본 적이 없는 태원이다. 그날은 자꾸 귀찮게 하니 짜증이 나서 쳐다본 것이었다. 그녀는 천진난만하고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었다. 바라보니 호감이 갔다.

"그럼 대위가 소위보다 높은 거예요?”

그녀는 정말 모르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소위부터 장교라고 하는데 소위 위에 중위가 있고 중위 위에 대위가 있어요.”

"그럼 대위가 가장 높은 장교예요?"

"아니오. 대위까지는 위관장교라고 하고 그 위에 또 영관장교들이 있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에요?”

   "소령, 중령, 대령 등으로 계급이 높아져요.”

태원은 대답을 하다 말고 종이를 꺼냈다. 말로만 설명을 하니 잘 못 알아듣는 듯하여 계급을 그려가며 설명해주었다. 그녀는 깔깔거리며 재미있다는 듯이 은근히 몸을 기대가며 듣고 있었다. 그녀의 몸 냄새가 향기롭게 느껴졌다. 차가 출렁거릴 때는 머리카락이 태원의 팔을 간질였다. 둘은 계급 이야기를 떠나 이런저런 이야기로 연결이 되어 꽤나 친한 사이처럼 재미있게 이야기를 했다.

“자, 이제 대구에 다 와 가네요. 우 대위님, 혹시 대도극장 아세요?”

그녀가 엉뚱한 질문을 했다.

"다름이 아니라 우리 집이 그 부근이에요. 다시 한번 대위님을 만나고 싶어요.”

무척 당돌한 처녀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싫지 않았다.

"대도 극장 앞에 난초 다방이라고 있어요. 내일 거기서 한 번 만나요.”

약속을 잡듯이 말하며 그녀는 떠나갔다. 고속버스를 내려 택시로 갈아타고 그의 집으로 가며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그토록 사랑했고 그리고 그 사랑의 열매가 탄생해 보러 간다고 천 리 길을 내려간다. 그런 시간에 처음 보는 여자를 만나 이야기하다 그새 호감을 갖고 내일을 약속하다니....... 태원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 놈이라는 자괴감이 들었다. 겨우 이런 주제에 남들에게는 독재를 하느니 인간성이 나쁘니 하면서 덤벼들고 욕하던 자신이 정말 부끄러웠다. 그는 속죄라도 하듯 버스를 내리며 그 약속을 길바닥에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