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를 피해' 주말은 인근 구룡포(九龍浦)를 찾았다
'코로나19를 피해' 주말은 인근 구룡포(九龍浦)를 찾았다
  • 강문일 기자
  • 승인 2020.03.02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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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를 피해서 주말은 인근 구룡포(九龍浦)를 찾았다.
구룡포 해수욕장 - 강문일기자 촬영
구룡포 해수욕장 - 강문일기자 촬영

2월 마지막 주말을 맞이해서 코로나19를 피해서 하루 종일 집에서 어떻게 보낼까 싶어서, 아내와 상의 한 끝에 포항(오천)에서 자가용으로 20분 거리인 구룡포에 다녀 왔다.

작년에 KBS - 2TV를 통해서 방송된 "동백 꽃 필무렵"과 주변 유명지를 둘러보고 왔다. 한편 마을 유래에 대해 소개한다. 구룡포는 행정구역으로는 "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ㅇㅇㅇ 리 " 라 한다.

 

【 1 】구룡포읍 구룡포리(九龍,  浦里)

○ 구룡포리(九龍浦里) 
영일만을 형성하고 있는 범꼬리의 동쪽 해안선이 남쪽으로 내리 달리다가 응암산의 한줄기와 만나는 지점에서 활처럼 휘어져 구룡포만을 이루는데 이를 끼고 길다랗게 놓여 있는 마을이다.

읍소재지로서 우체국, 파출소, 단위농협, 영일수산업협동조합, 신협, 새마을금고 등의 관공서와 금융기관, 구룡포 초등학교, 구룡포동부초등학교, 구룡포중·종합고등학교, 구룡포여자 중·종합고등학교 등의 각급 학교가 밀집돼 있다.  

1923년에 방파제를 쌓고 부두를 만듦으로써 본격적인 항구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예로부터 용두귀운(龍頭歸雲), 옥산반조(玉山返照), 주잠명월(珠岑明月), 항구장제(港口長堤), 유명조일(維溟朝日), 창주모연(滄珠暮煉), 우진화선(盂津畵船), 석문청풍(石門淸風)등 8가지를 구룡포팔경(八景)이라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때 장기현령이 늦봄에 각 마을에 순시하다가 지금의 용주리를 지날 때 갑자기 폭풍우가 휘몰아치면서 바다에서 용 10마리가 승천하다가 그 중 1마리가 떨어져 죽자 바닷물이 붉게 물들면서 폭풍우가 그친 일이 있는데, 9마리의 용이 승천한 포구라 하여 구룡포라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용두산 아래에 깊은 소(沼가)있었는데, 이 소(沼)안에 살던 아홉 마리의 용이 동해 바다로 빠져나가면서 승천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창주리(滄珠里), 염창골 
옛날 이 곳 해변(현재의 구룡포초등학교 자리)에 염전이 있었을 때 소금을 쌓아 두는 창고가 있었다하여 염창골이라 하다가, 그 뒤에 서늘한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어서 창주리라고 불러왔다 한다.

1936년 개설된 구룡포 시장이 있으며 1925년에 설립된 구룡포교회와 1935년에 설립한 성덕심인당 이란 절이 있다. 1942년 읍승격시 구룡포 1리와 2리로 분리 되었다.  

○ 중앙리(中央里), 도산리(桃山里) 
구룡포리의 중앙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리로 불려져 오고 있으며, 옛날 이곳에 복숭아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하여 도산리라고도 한다. 현재의 구룡포 3리와 4리에 해당되며, 1915년 세워진 용흥사라는 절이있다.  

○ 돌문(石門洞) 
옛날의 장기목장성의 출입문인 돌문(石門)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돌문 혹은 석문리라 불려오고 있다. 돌문은 높이 11m, 폭 6m정도의 자연석 바위였는데, 매암산을 중심으로 방목해 놓았던 말을 해 질 무렵 몰이하여 이 문을 통과할 때 숫자를 세어 축사에 넣었다고 한다. 안전사고의 위험과 교통의 원활한 소통을 위하여 1988년 제거하였는데, 그 돌 일부는 읍사무소 정원에 있다. 3.4리에 해당한다. 

○ 장안리(長安里) 
현 구룡포5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1953년 동리 분할 때 지형이 길다고 하여 장(長)자와, 마을이 편안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안(安)자를 따서 장안리라 이름지었다 한다. 마을 뒤편 언덕위에는 충혼탑, 충혼각, 용왕당, 구룡포개척자유공탑 등이 있는 구룡포공원이 있다.

충혼각은 1960년에 건립 된 호국 영령을 모신 사당으로 현재 중위 안대수 외 178위를 모시고 있다. 용왕당은 이지역의 풍어와 안전 조업을 비는 제당이다. 구룡포개척자유공탑은 일제 때 구룡포 개발에 공헌한 일본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탑인데, 해방 후 친일적 내용이 새겨져 있는 탑의 표면을 훼손하여 명문은 알아볼 수 없으나 폭 1.5m, 높이 5m나 되는 자연석의 탑신은 그대로 서 있다.  

○ 용주리(龍珠里), 사라끝(沙羅末) 
구룡포만의 동쪽 끝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로, 옛날 이 곳에 모래밭이 있었기 때문에 사라끝(沙羅末)이라 불려 왔으며, 마을 주민들이 풍어제를 올리기 위하여 인근 구룡포 5리 지역에 용왕당이라는 제당을 세우고 용주리라고 불렸는데, 마을 지형이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국이라는 데서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현 구룡포6리에 해당하며, 동쪽 끝에는 1948년에 설립된 구룡포중·종합고등학교가 있다.   

○ 새골(大新里) 
현 구룡포7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약 200년전 이 마을이 처음 생겼을 때 새로 생긴 마을이라 뜻에서 새골이라 했는데, 1942년 읍 승격시에 마을을 크게 번창시킨다는 뜻에서 대신리(大新里)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구룡포해수욕장이 있으며, 수산물가공업체인 동원식품(주)구룡포공장이 입주해 있다. 

【 2 】 구룡포읍 구평리(邱坪里)

○ 구평리(邱坪里) 
동해면 중산리와의 경계에 있는 달구벼슬산에서 발원되는 내를 따라 발달된 긴 골짜기와 동쪽 해안선에 'ㄱ'자로 길게 형성된 마을이다. 5개의 자연부락이 1리(새바우), 2리(邱坪, 학교마), 3리(都邱亭, 황사다미)로 나누어져 있다.

   
○ 구평(邱坪), 구반(龜盤)  
옛날 성지(性智)라는 풍수가 이곳을 지나 뇌성산 줄기가 뻗어내린 이곳이 평평한 두들로 되어 있으므로 구평이라 했다 하는데, 거북의 등과 같은 형상이라 하여 구반이라고도 불려오고 있다. 효자 하영식(河永湜)의 효자각이 있다.  

○ 학교마(學校村)  
1949년에 설립된 구룡포남부초등학교가 있었던 마을이라고 학교마 또는 학교촌이라 불러오고 있다.

  
○ 새바우(鳥岩)  
1949년에 설립된 구룡포남부초등학교가 있었던 마을이라고 학교마 또는 학교촌이라 불러오고 있다.  

○ 도구정(都邱亭)  
마을 뒤에 도봉사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혹은 마을의 모양이 독(항아리)과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 다른 일설에는 깊은 골짜기에 위치하는 관계로 난리를 피해 온 양반들이 그들의 도성과 같이 생겼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 황다사미  
마을 뒷산이 황새 모습이어서 명당으로 소문이 났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 3 】 구룡포읍 눌태리(訥台里)

○ 눌태리(訥台里) 
구룡포리 서쪽, 병포리 북쪽의 긴 골짜기 속에 4개의 자연부락이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는데 행정 구역상으로는 1리(큰동네, 탯골, 중태), 2리(樂田)로 구분되어 있다. 본래 장기군 외북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큰 동네, 약전, 태곡, 중곡, 광정, 눌방을 병합하고 눌방과 태곡의 이름을 따서 눌태리라 하여 창주면에 편입되었다. 

 
○ 약전(樂田), 구장터, 수페  
옛날 이 곳에 불미질('풀무질'의 방언)을 하던 곳이 있었다고 '불미골' 이라 불려 오고 있으며, 눌태리의 중앙에 위치한 마을이라고도 하여 중태리라고도 한다. 또한, 옛날에 안사묵(安思?)이 세운 시원당(始源堂 ; '향악계종집' 이라고도 함)이라는 정자가 있어 선비들이 공부하거나 노인들의 쉬는 곳으로 이용되었는데 1971년 1월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현재는 마을회관이 위치하고 있다.   

○ 탯골(台谷) 
약전 북동쪽에 태봉이라는 산이 있는데, 이 산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라 한다.  

○ 큰동네  
읍소재지에 인접해 약전이 지금과 같이 번창하기 전에는 눌태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는데 이에 연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불미골, 탯골과 함께 순흥안씨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1979년 이 곳에 눌태저수지가 건설되고 또 이 저수지가 구룡포읍 상수도 수원지화되면서 안쪽 골짜기와의 통로가 폐쇄되었다.   

○ 불미골, 중태(中台)  
옛날 이 지역에 불미질(풀무질)을 하던 곳이 있었다 하여 불미골이라 불려오던 마을이다.최근에는 눌태리의 중앙에 위치한다 하여 중태라 부르고 있다.

【 4 】구룡포읍 병포리(柄浦里)

○ 병포리(柄浦里) 
동해면 상정리에서 굴곡을 지나 구룡포읍으로 접어들면서 시작되는 좁고 긴 고디이골을 따라 뻗은 하천 하류에 우뚝 솟은 용두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로, 구룡포만을 끼고 구룡포리와 마주 보는 곳에 위치하며, 북쪽의 대보방면으로 통하는 도로와 남쪽의 장기방면으로 통하는 도로의 길목이기도 하다. 자래골, 웃자래골, 남포리등 3개의 자연부락이 행정구역상 각각 1,2,3리로 구분되어 있다. 수산물 가공공장이 많이 입주해 있고, 1982년에 설립된 구룡포여자중.고등학교가 이곳에 있다.   

○ 자래골(柄里)  
마을 앞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의 형상이 자래('자라'의 방언)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병리의 병(炳)자는 자래골을 한자로 표기할 때 '자래'의 뜻을 '자루'로 잘못 해석하여 적은 것이다. 이 마을 서쪽에는 봉의 머리같이 생긴 용두산(龍頭山)이라는 작은 산이 있다. 일제때 구룡포항방파제 축조공사를 위해 이 산을 많이 깎아냈다고 하는데, 정상에는 고려 때 수군첨사진기(水軍僉使鎭基)였던 토성터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지고 상수도 가압장이 들어서 있다.   

○ 웃자래골(上炳)  
자래골의 웃마을 이라고하여 웃자래골 또는 상병이라 한다. 순홍안씨 문중에서 세운 나곡서원(螺谷書院)이 있고, 고디이골 왼쪽 산기슭에는 1975년에 설립된 관음사란 절이 있으며, 마을 앞에는 200년생 느티정자나무가 있어 주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 남포리(南浦里), 맞구룡포, 피난민동네  
구룡포리 남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남포리라 불려 왔는데, 이 곳에서 구룡포리가 마주 보인다고 하여 맞구룡포라고도 불려진다. 또 6.25전쟁 때 피난 온 사람들이 많이 산다 하여 '피난민 동네' 라고도 한다. 진주하씨가 개척한 마을이다. 

【 5 】구룡포읍 삼정리(三政里)

○ 삼정리(三政里) 
남쪽으로 구룡포와 북쪽으로 석병리에 접해 있는 바닷가의 경치가 아름다운 마을로서 1리에 해당하는 범진과 2,3리에 해당하는 삼정 등 2개의 자연부락을 관할하고 있다. 옛 목장성내에 목관공해 유지가 있다.  

○ 범진(凡津) 
원래 지대가 낮아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바닷물이 자주 범람한다 하여, 혹은 나루터가 넓다고하여 범진이라 하였는데 '범늘' 이라고도 한다.  

○ 삼정(三政) 
옛날에 3정승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혹은 삼정승을 지낸 분이 살았다 하여, 또 다른 일설에는 마을의 지세가 좋아 3정승이 날 것 같다고 하여 불려진 이름이라 한다. 마을 서북쪽에는 고분이 산재한 순능(순능재라고도함)이란 이름의 야산이 있는데, 한 때 이 곳을 개간하여 밭을 만들었다가 20여년 전 이 마을이 태풍을 만나 큰 피해를 입게 되자 3년마다 벌이는 별신굿을 한 즉 이 재를 깎은데 원인이 있다 하므로 다시 조림을 한 일화가 있다. 이 마을 앞바다에는 소나무가 울창하고 경치가 아름다워 바람 맑고 달 밝은 밤이면 신선이 놀았다고 하는 관풍대(觀風臺)라는 바위섬이 있는데, 육교가 가설되어 통행이 자유로우며, 횟집이 성업중이다.  

【 6 】 구룡포읍 석병리(石屛里)

○ 석병리(石屛里) 
마을을 끼고 있는 긴 해안선이 깎아 세운 듯한 암벽으로 되어 있는 곳이 많아 마치 병풍을 세워 놓은 모양을 하고 있다 하여 석병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마을 남쪽에는 길게 바다쪽으로 뻗은 송림을 배경으로 하여 폐교된 석병초등학교 터가 있다. 마을 남동쪽 바닷가에는 병풍모양을 하고, 끝이 뾰족 한 아흔아홉 골짜기를 이루고 있다 하여'아흔아홉골짜기'라고도 불리는 병풍바위가 있다. 진등 동쪽에는 흔히 '봉우재'라고 부르는 대곶봉수대(大串熢燧臺)터가 있다. 이 봉수는 남쪽으로 뇌성산봉수, 북쪽으로 사지봉수에 응하였다 한다.   

○ 석병(石屛)  
원래 지대가 낮아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바닷물이 자주 범람한다 하여, 혹은 나루터가 넓다고하여 범진이라 하였는데 '범늘' 이라고도 한다.  

○ 두일포(斗日浦) 
조선 숙종때의 명유(名儒)인 송시열선생이 장기현에 유배되어 있을 때 이곳을 자주 왕래하게 되었는데, 이 마을 뒷산의 모양이 마치 말(斗)을 엎어 놓은 것 같고, 마을 앞의 나루터가 일(日)자형을 이루고 있어,두일포라 부르게 했다 하며, 흔히 '들포' 라고도 부른다.  

【 7 】 구룡포읍 성동리(城洞里)

○ 성동리(城洞里) 
동해면 상정리 금오산에서 발원하여 중산리, 공당리를 거쳐 내려오는 하천을 따라 동해안으로 통하는 도로를 끼고 남쪽의 뇌성산과 북쪽의 광정산 사이의 긴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이다. 5개의 자연부락 1리(達吉, 태, 돌곡), 2리(魚龍谷), 3리(잣뒤)로 구분되어 있고 상성(上城)은 성동2리,하성(下城)은 성동3리를 말한다.   

주변경치가 아름다워 고죽령청풍(孤竹嶺靑風), 광정봉낙하(廣鼎峰落霞), 장백산록죽(長柏山綠竹), 신산협청송(新山峽靑松), 대보평농가(大洑坪農歌), 어용곡절벽(魚龍谷絶壁), 정자려고목(亭子閭古木), 수구등모연(水口嶝暮煙)을 성동2리에 거주하시다 1976년에 작고한 오극상(吳極象)님이 1967년도 발행한 일월향지(日月鄕誌)의 22페이지에 처음으로 시를 작성하여 제출하면서 상성팔경(上城八景)으로 전해지고 있다.  

○ 달길(達吉)  
마을의 모든 일이 순조롭고 운수가 좋은 사람이 많이 나는 곳이란 뜻에서 달길이라 불려 왔다고 한다. 골짜기가 깊어 달이 떠서 길게 비춰준다고 하여 '달길리'라 불러 오던 것을 달길('達吉')이라 적었다고 한다. 이 마을과 아래쪽에 있는 테, 돌곡을 합하여 흔히 달길리라 부르기도 하는데, 바다로부터 깊숙한 골짜기에 위치하여 임진왜란 때는 피난처로 이용되었다 한다.  

○ 태(太谷) 
달길 입구에 있는 마을로 큰 계곡을 끼고 있다 하여 태곡(太谷)또는 '태' 라고 불려진다.  

○ 돌곡 
동해면 공당리 넘어가는 마루에 위치하는 마을로 길가에 칠성방우라 불리는 고인돌이 있는데 여기에 연유한 이름이다.  

○ 어룡곡(魚龍谷), 옷자두(上城里) 
처음에는 금당리라 했으나 후엔 버무달비 혹은 어용곡이라 불려 오고 있으며, 3리에 해당하는 아랫자두(下城里)위에 있어 웃자두 혹은 상성리라고도 한다. 어용곡이란 이름은 옛날 이 곳에 있었던 천지못이라는 못 속의 물고기가 용으로 화하여 승천하면서 꼬리로 못둑을 쳐 밑의 마을이 물에 떠내려갔다는 데서 연유한다. 

○ 잣 뒤, 잣두(城里), 하성리(下城里)  
옛날에는 성(城)을 '잣'이라 하였던 바, 성(뇌산성)뒤에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잣 뒤' 또는 '자두'라 불려 왔는데, 그 후 성동이란 이름이 생겨 널리 불려지게 되었다. 상성리 아래쪽에 있다하여 하성리라고도 하며 영천 황보씨의 집성촌으로 황보인을 기리는 광남서원(廣南書院)이 있다. 뇌성산(212m) 이 마을 남쪽에 위치하여 장기면 모포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고, 모포리 바다쪽으로는 심한 경사를 보이고 있어 예부터 전력요충지로, 정상에 뇌산성(磊山城)과 봉수대가 있다. 이 산에는 뇌록(磊綠), 인삼(人蔘), 자지(紫芝), 오합(蜈蛤), 봉청(蜂淸), 치달(雉獺), 동철(銅鐵)등 칠보(七寶)가 나서 나라에 진상하였는데 이에 유래하여 칠보산이라고도 한다. 

【 8 】 구룡포읍 장길리(長吉里)

○ 장길리(長吉里) 
남쪽으로는 구평리 북쪽으로는 하정리와 경계를 이루면서 바다에 접해 있는 마을로 장구목, 생길리 등 2개의 자연부락이 있다. 장구목, 생길리를 병합하여 장구목의 장(長)자와 생길리의 길(吉)자를 따서 장길리라 하였다.   

○ 장구목 
장길리에서 으뜸되는 자연부락으로 지형이 장구의 목처럼 생겼다.  

 
○ 생길리(生吉里) 
처음 이 마을에 들어온 주민들이 마을이 흥하라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라 한다.  

 
○ 버릿돌  
마을 뒤에 도봉사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혹은 마을의 모양이 독(항아리)과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 다른 일설에는 깊은 골짜기에 위치하는 관계로 난리를 피해 온 양반들이 그들의 도성과 같이 생겼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 9 】 구룡포읍 하정리(河亭里)

○ 하정리(河亭里)  
구룡포읍 소재지 남쪽 약 10리 되는 곳에 해안선을 따라 길게 형성된 마을로 5개의 자연부락이 1리(임물), 2리(하성, 태끼, 솔머리), 3리(당사포)로 구분되어 있다. 

  
○ 임물(臨勿) 
1700년경 한씨와 편씨가 개척한 마을로, 예로부터 물과 인심이 좋고 많은 인물이 배출될 것 같다고하여 임물이라 했다 한다.  

○ 하성(河城) 
진주 하씨가 개척한 마을로 마을의 생긴 모습이 성을 쌓아 둔 것같이 생겼고, 하씨들이 많이 살고 있으므로 하성이라 불렀다 한다.  

 
○ 솔머리(松亭)  
마을의 생긴 모양이 쇠머리 같은 형상이며, 그 머리에 해당하는 바닷가 언덕위에 큰 소나무 정자가 숲을 이루고 있다 하여 '솔머리'로 불러졌다 하며, 또 이 소나무 정자가 있는 언덕을 일송정이라 부르는바, 여기에 연유하여 송정이라고도 불려지고 있다.  

○ 태끼, 토끼  
배가 닿은 포구에서부터 마을의 끝까지가 반달 형상을 하고 있는데다 마을 어귀의 지형일 돌출하여 토끼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이것을 두고 사람들이 토끼가 동해에서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는 형국(玉兎望月形)이라 하여 태끼('토끼'의 방언)혹은 토끼라 불렀다 한다.   

○ 당사포(當士浦)  
마을 뒤에서 보면 '堂'자 같고, 앞에서 보면 '土'자 같다고 하여 당사포라 했다 한다. 또 다른 일설로는 선비들을 가르치는 서당이 있었던 곳이라고 그렇게 불려졌다고도 한다. 마을 뒤 언덕 위에는 수년 전에 세워진 경북대학교 수련원이 있다.

【 10 】 구룡포읍 후동리(厚洞里)

○ 후동리(厚洞里) 
동해면과의 경계를 이루는 헛재에서 발원되는 물건을 따라 동쪽으로 이어지는 길다란 계곡이 북쪽의 눌태리에서 흘러내리는 개울과 만나는 지점에서 대밭들을 형성하는데, 이 들 서북쪽에 있는 죽전산 아래의 개울을 사이에 두고 2개의 자연부락이 있으니 북쪽을 후리이라 하고, 남쪽을 음달마라고 한다. 이 마을 서쪽에는 1943년에 걸설된 후동지가 있고, 서북쪽 골짜기에는 옛날 이 곳에서 병기를 만든 곳으로 전해지는 주철장이 있다.  

○ 후동(厚洞)  
옛날부터 이 마을은 다른 어촌에 비해 농토가 많은 편이라 주민들의 살림살이가 넉넉하고 인심이 후한 곳으로 소문이 나 있었는데, 구룡포와 포항간의 신작로인 31번 국도가 뚫리기 전만 하여도 이 마을 서쪽의 헛재를 넘어서 동해면 상정리를 거쳐 포항으로 왕래하던 구룡포사람들이 날이 저물거나 굶주리면 이 동네에서 자고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하여 후동이라 하였다 한다. 이 마을 뒤 죽전산 일대에는 수시수 또 후동수라 하는 넓은 대나무 숲이 있다. 이 곳에는 옛날부터 질 좋은 신이대가 많이 났으므로 조선시대에 울산병영에서 관리하며 해마다 베어다가 활을 만들었다고 하며, 대를 꺾는 사람은 볼기 열 대를 맞았다고 한다.   

○ 음달, 음달마  
후동 남쪽 산기슭 응달에 위치하며, 옛날에는 음실이라고도 불렀다. 마을뒤에는 옛날 원효대사와 동학교주 최제우가 수도했다는 전설이 있고, 요즘도 치성드리는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불썬바우와 불성사가 있다.

【11】 KBS - 2TV 방영된 " 동백꽃 필 무렵 " 촬영 장소를 찾아가다.

  가) 동백이가 극 중 살던 곳

KBS - 2TV 방영된 "동백꽃 필 무렵" 동백이가 실제 거주하던 곳 - 강문일 기자
KBS - 2TV 방영된 "동백꽃 필 무렵" 동백이역(공효진)가 실제 거주하던 곳 - 강문일기자 촬영

드라마 " 동백꽃 필 무렵"으로 유명해진 구룡포항 일대. 기존에도 일본인 가옥거리로 소소하게 관광객들이 방문했었는데 "드라마가 인기를 얻은 이후 방문객수가 급증해  명실상부 핫한 관광지로써 평일에도 찾아 오시는 분들도 많다"고 관광해설사의 설명이다.

  나) 일본인 가옥거리

일본인 가옥거리 - 강문일기자 촬영
일본인 가옥거리 - 강문일기자 촬영

 일본인인 가옥거리 즉 계단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공원이 나오는데 그곳에 가면 아홉마리의 용이 조각으로 만들어져 있다. 한참 그곳 구경하면 배가 출출하다. 구룡포 시장에  "진미식당"에 가면 구룡포 특유의  모리국수가 있는데 그것을 먹으면 아주 좋다.

아홉마리 용 - 강문일기자 촬영
아홉마리 용(조각) - 강문일기자 촬영

    구룡포 공원내에 있는 아홉마리 용이다.

구룡포 시장내 "진미식당" 입니다. - 강문일기자 촬영
구룡포 시장내 "진미식당" 입니다. - 강문일기자 촬영

모리국수의 어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경상도 방언 중에 모디라(모이라)가 있다. 국수에 여러 가시 해물이 모디었다 해서 모디국수였다가 발음상 모리국수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의견이다. 또 처음 모리국수를 접한 사람들이 이 음식이름을 묻자 "내도 모린다"라고 해서 모리국수라고 되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가장 유력한 근거로는 일본식 표기를 들기도 한다. 보통보다 많이 담는다는 뜻으로 모리(もり)가 있는데 이 뜻대로 한다면 모리국수는 보통보다 많은 양의 국수가 된다. 실제로 셋이 가서 2인분 시켜도 3인분 이상의 양이 나오는걸 보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셈이다. 또 구룡포는 신사가 지어질 정도로 일제시대에는 일본인의 근거지였다. 어느 지역보다 일본어가 흔하게 쓰였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해물과 생면을 넘치도록 넣고 끓여먹는 모리국수, 구룡포 향토음식이다.- 강문일 기자 촬영
해물과 생면을 넘치도록 넣고 끓여먹는 모리국수, 구룡포 향토음식이다.- 강문일 기자 촬영
진미식당 메뉴 - 강문일기자 촬영
진미식당 메뉴 - 강문일기자 촬영
진미식당 밑 반찬 - 강문일기자 촬영
진미식당 밑 반찬 - 강문일기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