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 팥죽
동지 팥죽
  • 노정희
  • 승인 2019.12.22 16:1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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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는 우리나라 4대 명절 중 하나
- 공공씨(共工氏)의 아들은 역귀, 팥죽으로 물리쳐

식구도 단출한데 팥죽을 끓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팥죽을 생각했다는 자체부터 팥죽을 ‘끓여야’하는 쪽으로 기운다. 예전에야 가마솥에 팥을 삶아 체에 내리고, 찹쌀가루로 새알심 만드느라 진종일 정지에 붙들려 있어야 했으나 요즘에야 식은 죽 먹기 아닌가.

동짓날인데 그냥 지내기 서운하니 팥죽을 조금만 끓여보기로 했다. 지난밤에 팥과 찹쌀을 물에 불려놓았다. 아침에 일어나 팥은 압력솥에 삶고, 찹쌀은 소쿠리에 받혀 물을 뺀 후 분쇄기에 갈았다. 익반죽한 새알심은 물양을 못 맞춰 질척하긴 하나 그런대로 사용할 만하다. 푹덕푹덕 팥죽을 쑨다. 소금간 심심하게 하고 불 낮춰 뜸 들이니 팥죽, 완성이다.

 

동짓날 팥죽 쑤어먹는 풍속은 중국에서 전해온 것이다. 중국 신화에 나오는 공공씨(共工氏)는 황하를 다스리는 신이었다. 황하의 홍수로 인해 강물이 범람해 그의 아들이 죽었다. 그의 아들은 역귀(疫鬼)가 되어 수인성 전염병을 퍼트렸다.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이 뜨거운 팥죽을 끓여 먹고 영양을 보충해 병을 이겨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동짓날 뜨거운 팥죽을 먹으면 소화가 잘되고 양의 기운을 보충할 수 있어 몸에도 이로웠을 것이다. 붉은 색깔의 팥은 ‘양(陽)’을 상징하므로 ‘음(陰)’의 속성을 가지는 역귀나 잡귀를 물리치는 것으로 인식했다.

믿음은 얼마나 질기고 거룩한가, 동짓날 팥죽을 쑤어 대문이나 장독대에 뿌리면 귀신을 쫓고 재앙을 면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사하거나 새집을 지었을 때도 팥죽을 쑤어 집 안팎에 뿌리고, 이웃과 나누어 먹었다. 우리 할머니도 팥죽을 쑤어 장독대, 곳간, 우물, 대문 앞에 차려놓고 기도를 올렸다. 할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숭고했다. 자신의 안위가 아니라 후손들의 건강과 앞날을 위한 기도였다. 며칠 동안 살얼음이 서걱거리는 팥죽을 먹었다. 당시에 팥죽을 먹으면 병에 걸리지 않고 나쁜 일도 생기지 않는다는 할머니 말씀을 철석같이 믿었으니까.

《영조실록》에 ‘동짓날 팥죽은 비록 양기가 되살아나는 것을 기원하는 뜻이라고는 하지만, 귀신을 쫓겠다고 문지방에다 팥죽을 뿌려대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니 그만두라고 명했는데도 아직까지 팥죽 뿌리는 행위가 계속되고 있다. 이후로는 철저하게 단속해 잘못된 풍속을 바로잡아라.’라는 기록이 있다. 임금의 명령도 먹혀들지 않았을 정도로 동짓날 팥죽을 뿌리는 풍습이 지나쳤던 모양이다.

설, 한식, 추석, 동지는 우리나라 4대 명절의 하나이다. 동지(冬至)는 글자 그대로 겨울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동지를 기점으로 점차 낮의 길이가 길어진다. 예전에는 동지를 아세(亞歲)라고 하여 새해에 버금가는 날로 보았다. 옛 속담에 “동지 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먹는다”고 하지 않던가.

팥죽에는 단백질, 지방, 당질, 회분, 섬유질과 비타민 B1이 많이 들어있다. 한마디로 몸에 좋은 음식이다.

독립군 큰아이한테 전화 걸려온다. 팥죽 한 그릇 사서 먹으랬더니 비싸지 않냐고 묻는다. “몇천 원이면 한 그릇 사 먹을 수 있다. 한 해 병치레도 물리쳐줄 테고, 나쁜 일도 면할 수 있다.” 예전 할머니 말씀을 그대로 옮긴다. 쿡 웃음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