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⑯탈곡기 굉음에 온몸을 들썩이며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⑯탈곡기 굉음에 온몸을 들썩이며
  • 정재용 기자
  • 승인 2019.12.16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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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랑와랑’ 집 타작 ⇢ ‘탁다깨이’ 논 타작 ⇢ 콤바인 타작으로 변화

타작은 볏단을 집으로 실어 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가장 원시적인 지게로부터 옹구, 소달구지로 날랐고 리어카가 보편화되면서 지게를 대신했다. 볏단 사이에 둥지를 틀었던 들쥐는 부리나케 달아나고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새끼들은 알몸을 드러낸 채 서로 부둥켜안고 떨었다. 예닐곱 마리 정도였다.

타작 전날 마당은 놉을 들여 깻단 타는 일로 분주했다. 무댕기 단을 헐어서 탈곡하기 알맞은 굵기로 갈라 묶은 일을 깻단 탄다'라고 했다. 볏단은 탈곡기 좌우로 쌓아 안 보고도 잡기 좋도록 정렬했다. 쌓고 나면 성벽 같기도 하고 집을 향해 학익진(鶴翼陣)을 펼친 모양이었다.

탈곡기는 축담'에서 마당을 사이에 두고 남쪽으로 물려서 차렸다. 집을 지을 때 마당보다 약간 돋운 지대(址臺)를 축담이라 하고 쭉담'이라고도 했다. 탈곡기는 혼자 밟는 1인용과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밟는 2인용이 있었다. 탈곡기는 발판을 눌렀다 뗐다하면 크랭크가 수직 운동을 회전 운동으로 바꿔서 탈곡할 원통(圓筒)을 회전시켰다. 원통에는 A자형 강철이 횡으로 줄지어 박힌 나무판을 옆으로 잇대어 만든 것으로 A자형 강철이 벼이삭을 훑었다. 2인용은 원통의 가운데 폭 1Cm되는 양철 테를 메워서 나무판을 단단히 묶고 두 사람 간의 경계를 표시했다.

와랑와랑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탈곡기에 볏단을 갖다 대면 차르르" 알곡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했다. 오른쪽 한번 왼쪽으로 한번 돌려 볏단의 겉을 훑은 뒤, 속을 헤집어 부채처럼 펴고는 앞뒷면을 차례로 훑었다. 볏단이 짚단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다른 볏단을 집어 들었다. 짚단을 뒤로 던지는 것과 옆에 놓인 새 볏단을 집어 드는 것은 거의 동시(同時)였다. 탈곡기는 와랑와랑이라는 애칭(愛稱)으로 통했다.

한쪽 발은 땅을 딛고, 한쪽 발로는 탈곡기 발판을 밟고, 손으로는 눈길을 탈곡기에 둔 채 더듬어서 볏단을 잡았다. 모든 게 전자동(全自動)이어서 탈곡기는 바퀴는 잠시도 헛도는 일이 없었다. 다리가 아프면 발을 서로 바꿨다. 어깨를 들썩이며 엉덩이를 실룩거려 신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오금이 저리고 장딴지가 뻐근하고 입이 탔다.

타작마당에는 사람이 있는 게 한정이었다. 두 사람이 있으면 한 사람은 탈곡을 하고 한 사람은 까꾸리(갈퀴)로 탈곡기 앞에 떨어진 낟알을 끌어냈다. 한 사람이 더 있으면 발판을 함께 밟거나 볏단을 탈곡기 가까이로 옮겨 채우는 일을 했고, 거기에 또 더 있으면 뒤로 나온 짚단을 멀리 치우거나 짚 볏가리를 가렸다. 사람이 보강될수록 일은 분화(分化)됐다.

무댕기 짚 볏가리. 정재용 기자
무댕기 짚 볏가리. 정재용 기자

아이들은 짚단으로 서로 던지기 장난치면서 놀다가 탈곡하는 사람이 던지는 짚단에 머리를 맞으면 깔깔거렸다. 닭들도 포식하는 날이었다. 부엌에서는 무 썰어 넣고 끓인 갈치찌개 냄새가 풍겨 나와 군침을 돌게 했다.

큰물에 잠긴 벼는 흙이 묻어 있어서 타작할 때면 온 집을 흙먼지로 뒤덮었다. 콧구멍으로 들어간 먼지는 가래를 뱉으면 탄가루처럼 새카맣게 묻어 나왔다. 그런 벼는 쭉정이가 많아서 곡수가 절반에도 못 미쳤고 짚단도 여물로 쓰거나 가마니를 치는데도 사용할 수 없어서 이리저리 손해였다.

탈곡하는 일이 늦어지면 이튿날로 이어지고, 탈곡을 마치면 우케 지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탈곡해서 알곡과 쭉정이 그리고 검불이 섞인 벼를 우케'라고 하고 탈곡 과정에 떨어져 들어 간 벼 잎을 뿍띠기(검불)'라고 불렀다. 그리고 바람을 이용하여 알곡 가려내는 일을 우케 진다'라고 했다.

풍구에 우케를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 뿍띠기는 멀리 날아가고, 쭉정이는 도중에 떨어지고, 알곡은 옆의 다른 구멍으로 나왔다. “심판의 날에 알곡과 쭉정이가 판가름 된다는 설교를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풍구가 없으면 짚 소쿠리에 담아서 머리 위로 쳐들고 바람에 날렸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는 화문석(花紋席)의 중간을 발로 누르고 양 귀를 두 손으로 잡은 뒤 나비 날갯짓을 해서 바람을 일으켰다. 시집 올 때 가져온 혼수품도 농사를 위해서는 아낌없이 내 놓았다. 화문석을 사람들은 채식(彩飾)자리라고 불렀다. 양철로 된 팔랑개비(바람개비)’가 나오면서 우케 지기도 한결 쉬워졌다. 팔랑개비도 처음에는 손으로 돌리는 것이다가 나중에는 발로 밟는 것이 나왔다.

탈곡기나 팔랑개비나 모두 가끔 톱니바퀴에 윤활유(grease의 일본식 발음인 구리스로 불렀다)를 쳐 줘야했다. 윤활유 담은 통을 거꾸로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밑바닥을 눌렀다 뗐다하면 압력으로 모기주둥이 모양의 관을 통해 기름이 흘러나왔다.

타작 때 가장 난감한 것은 도중에 비가 내리는 것이었다. 타작 전에 오면 볏가리 다시 쌓고 날짜 미루는 것으로 끝나지만 구름이 짙은데도 설마하고 타작을 하다가 비를 만나면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볏단은 젖건 말건 버려두고 알곡 챙기느라 분봉(分蜂)하는 벌떼처럼 눈에 불을 켜고 허둥댔다. 폭우가 쏟아지면 곡식이 하수구로 쓸려 내려가기 때문에 축담이고 부엌이고 가릴 것 없이 비를 피할 곳으로 막 퍼다 날랐다.

타작과 우케 지기를 마친 알곡은 80kg들이 가마니에 담아내야 했는데 가마니를 장만하기까지는 뒤주(‘두지라고 불렀다)에 담아두었다. 뒤주는 마당의 지대가 높은 곳에 짚으로 바닥을 높이 깔고, 그 위에 가마니를 둘러 지름 2~3m의 원기둥을 만들고, 지붕을 짚으로 덮은 짚 뒤주가 대부분이었다. 축담에 공간이 있는 집은 랭가(煉瓦, 벽돌의 일본어)’로 곳간을 짓고 앞면은 나무판자를 바닥서부터 차례로 끼워 가는 것이었다. 작은 시멘트 벽돌을 브로크(블록, block의 일본식 발음)’라 하고 그것보다 네 배 정도 크기에 중간에 구멍이 두 개 뻥 뚫린 벽돌을 랭가라고 불렀다.

급하면 멀방(안방에 딸린 작은 방을 그렇게 불렀다)’의 안쪽에 가마니 만들기 전 거적으로 뒤주를 만들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윗목으로 밀려나고 문풍지는 머리맡에서 떨었다. 마당의 뒤주에는 수시로 쥐가 달려들어 갉아대고 식구들은 그 소리에 신경 쓰느라 잠을 설쳤다. 누구든지 먼저 듣는 사람은 부리나케 방문을 열고 뛰쳐나갔는데 어느 때는 안방 문과 멀방 문이 동시에 열렸다. 농부에게서 벼 낟알 하나하나는 자식이고 생명이었다.

콤바인이 남긴 '곤포(梱包) 사일리지(silage)'가 군데군데 놓여있고 멀리 무릉산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콤바인이 남긴 '곤포(梱包) 사일리지(silage)'가 군데군데 놓여있고 멀리 무릉산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경운기가 나오면서 탈곡하는 일도 기계화가 됐다. 경운기 엔진이 내는 탁탁탁 폭발음을 따라 사람들은 경운기를 탁다깨이라고 불렀다. 탁다깨이 타작은 무댕기 단을 풀어서 다이() 위에 올려놓으면 체인이 물고 들어가서 알곡을 털고 짚을 뱉어냈다. 와랑와랑 타작이 사라지면서 깻단 탈 일도 없어지고 짚단도 무댕기 단으로 묶었다.

지금은 콤바인이 대세다. 19824월 대동공업()이 콤바인을 제작하면서부터 벼를 베면서 동시에 탈곡까지 하는 시대가 열렸다. 이제 발로 밟던 탈곡기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유물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