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산지와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②
주산지와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②
  • 이원선 기자
  • 승인 2019.11.18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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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닌데 그 년이 다른 남자를 만나잖아요! 그래서 찔렀어요!”
겨울은 삭막하여 생명이 스러지기도 하지만 또 다른 생명을 품는 시기다.
어떻게 보면 어린 날의 장난기어린 치기에 불과했다.
물안개에 휩싸인 왕버들! 이원선 기자
물안개에 휩싸인 왕버들! 이원선 기자

남겨진 스님도 여전한 나날들 속에서 가을을 맞고 있었다. 고양이를 사고 생필품을 산 스님이 떡 한 점을 입에 넣다가 신문 한쪽 귀퉁이에서 사연 하나를 읽는다. “30대 남자 아내를 칼로 찌르고 도주 중!”불에 덴 듯 망설임도 잠시 헝겊 쪼가리를 모은 스님이 삼매경에 든 듯 가사불사다. 시침질, 홈질, 감침질, 박음질, 공그르기, 새발뜨기 등의 어설픈 솜씨일망정 떠듬떠듬 승복 한 벌을 짓는다. 정성으로 치자면 상사뱀의 저주를 풀고자 천평사를 찾은 원나라 공주의 구박덩어리 가사불사의 절박한 심사를 넘는다. 승복이 완성되던 날 전날의 예언처럼 범죄자로 변한 그가 돌아온다.

스님을 본 그가 머리를 감싸 “나는 아닌데 그 년이 다른 남자를 만나잖아요! 그래서 찔렀어요!”

사랑을 배신당한 그가 속세를 잊고자 승복을 입었다지만 이미 삶의 의미를 잃었다. 눈과 코와 입을 폐(閉)한 그는 주체하지 못할 죄업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해 죽음을 택했지만 질긴 목숨은 아등바등이다. 보다 못한 스님이 “남의 목숨은 쉬워도 내 목숨은 본래가 어렵니라! 못난 놈!” 노여움 아래 목숨을 건진다.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주산지. 이원선 기자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주산지. 이원선 기자

비록 목숨은 부지했다지만 살기는 여전했다. 희번덕이는 눈은 피를 찾고 일그러진 얼굴은 세상의 고통을 죄다 안은 듯 고뇌한다. 칼을 손에 쥔 그는 보이는 족족 찌를 기세다. 그래야만 분이 풀릴 표정이다. 팽팽한 긴장이 감도는 순간 노스님은 속세를 초월한 듯 고양이 꼬리를 붓으로 대신하여 마룻바닥에 글을 쓴다. 한 자 또 한 자가 모여 거대한 문장을 이룰쯤 노스님의 호통 아래 피 묻은 칼로 한 자, 한 자를 음각으로 새겨나가고 곧장 형사들이 들이닥친다. ‘모지사바하’(菩提娑波詞)를 끝으로 반야심경이 마음에 새겨지던 그 시각 그는 또 다른 세상을 향해 산문을 열었다. 그날도 가을은 깊어 단풍은 유난히도 붉고 물안개는 짙어 작은 암자를 지우고 있었다.

겨울은 삭막하여 생명이 스러지기도 하지만 또 다른 생명을 품는 시기다. 스님은 자신이 가야할 길을 알고 있었다. ‘폐(閉)’이목구비, 즉 코를 막아 숨을 멎고, 눈을 막아 색을 죽이고, 귀를 막아 세상과 단절하며 입을 막아 죄업을 차단한 것이다. 사지의 버둥거림을 잠재워 피안으로 가는 길이다. 장작을 쌓은 뒤 장좌와불(長坐臥不 : 불교 수행의 한 방법으로 눕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이 되어 자화장(自火葬 : 스스로를 불태움)으로 해탈한 것이다. 그날 이후 뱀 한 마리가 거짓말처럼 나타나 스님이 벗어놓은 승복 위에서 똬리를 틀어 살기 시작한다. 사미승의 장난질에 죽었던 뱀이 윤회의 억겁에 따라 실상으로 나타난 지도 모른다.

봄이 가고 여름이 물처럼 흘려 가을이 오기를 여러 해, 찬바람이 일고 눈이 내려 호수가 얼음으로 가득하던 어느 날 중년의 한 남자가 바람이 되어 나타난다.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통념의 죄과를 치른 그가 돌아와 제일 먼저 한 일은 노스님의 사리를 수습하여 얼음불상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때 김기덕 감독은 불속으로 뛰어든 노스님과 욕망과 굴레를 쓰고 살인자가 된 죄인과 감독 자신의 생이 따지고 보면 다를 바 없다고 어필하고 있다. 겨울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김 감독은 불경을 독송하고 몸을 수련하는 등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

물안개와 가을 단풍. 이원선 기자
물안개와 가을 단풍. 이원선 기자

그 날도 뱀은 불상 주위를 맴돌았고 찬바람은 사정없이 얼굴을 할퀴었다. 바람이 바람을 부르듯 문득 얼굴을 보자기로 감싼 묘령의 여인이 갓난아기를 안고 바람처럼 찾아들었다. 그날 밤 여인은 애기를 놓고 바람이 되어 산문을 향해 가는 중 얼음 구멍에 빠져 죽는다. 시체를 건져 여인의 얼굴을 확인한 스님은 허리에 맷돌을 달아 태산을 업은 듯 미륵반가사유상을 받쳐 들고는 눈 쌓인 내를 건너고 돌길을 지나는 등 고행의 길을 나선다.

세월은 흘려 아이는 자라고 봄이 왔다. 그 옛날의 봄처럼 동자승과 김감독은 산문을 나섰다. 그때 본 동자승의 장난기는 어린 날의 김기덕이다. 다른 점이라면 돌을 매단 것이 아니라 입에다 돌을 넣는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 거미를 희롱하고 메뚜기의 다리를 뜯고 개미를 죽이고 잠자리의 꼬리에 실을 묶는 것 등이다. 어떻게 보면 어린 날의 장난기어린 치기에 불과 했다.

물고기 입에 돌을 넣고, 뱀을 잡아 입에 돌을 넣고, 개구리 입에도 돌을 넣는다. 고통에 절은 뱀의 용트림 같은 몸부림, 개구리도 물고기도 하늘을 뒤로 물속으로 곤두박질이다. 그 모습이 물속으로 가라앉던 여인의 마지막 모습을 닮았다. 그날 죽은 여인은 칼에 찔린 아내의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삶의 업 속에 김 감독도 세월을 뒤집어 쓴 노스님이다. 동자승을 보는 눈길이 옛날의 노스님의 눈길을 닮은 것이다. 여전히 나뭇가지를 흔드는 것은 바람이다.

조그마한 암자라 해도 어쩔 수 없다. 미구의 어느 날엔 병약한 처녀가 바람처럼 찾아들고 청년이 된 소년은 함께 배를 저어 산문을 나서는 중에 자비랍시고 기르던 닭은 산기슭 어디엔가 풀어 줄지도 모른다.

잔잔한 호수 면으로 스멀스멀 물안개가 오르고 있다. 이원선 기자
잔잔한 호수 면으로 스멀스멀 물안개가 오르고 있다. 이원선 기자

특별한 삶이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따지고 보면 다 같은 삶이다. 산꼭대기 너럭바위에 올라앉은 미륵반가사유상이 아스라이 보이는 주산지의 전경을 조용히 내려다본다지만 그것은 김 감독 자신이고 내 자신일지도 모른다. 개구리와 물고기를 괴롭히고 뱀을 괴롭혀 죽게 하는 그 모든 것은 따지고 보면 내 자신인 것이다. 모든 실상은 내가 있으므로 존재하듯 말이다.

긴 세월동안 주산지의 풍경도 많이 변했다.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목책이 둘러쳐지고 요즈음 유행하는 나무데크가 등장했다. 안쪽 나무데크에 서면 잉어와 붕어 떼가 몰려들어 유영을 한다. 그 크기도 어마어마해서 큰 것은 1m를 훌쩍한다. 그들이 떼를 지어 다니는 모습이 장관이라 주산지의 또 다른 볼거리로 등장하고 있다.

반면 아쉬운 점도 없잖아 끊임없이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몸살을 앓은 듯 왕버들의 군락지도 많이 파괴되었다. 고목이 쓰러진 자리로 풋풋한 새 생명들이 간극을 채운다지만 음전하고 진득한 고유미가 아쉽다. 옛 풍경이 그리운 사람들은 잔잔한 호수 면을 바라다보며 “저기에 큰 고목이 있을 때가 좋았는데”그리움에 젖기도 한다.

이 가을 사람들은 바람이 되어 주산지를 찾고 자연은 주산지를 바람으로 일궈 문득문득 꿈을 꾸는 듯 선경의 경치를 연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