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무실한 '男尊女卑'
유명무실한 '男尊女卑'
  • 배소일 기자
  • 승인 2019.10.21 16: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1세기는 ''여존남비'의 대두

 

남녀불평등 현상은 수렵 및 채집 사회 이전의 거의 모든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경우는 조선에 유교적 이념이 널리 퍼지면서 ‘남존여비’라는 말로 용어화되고 관행이 될 정도로 사회적이며 이념적, 도덕적으로 강조되었다.

남존여비 사상은 세계 어디에서도 존재해 왔지만, 대부분 상류층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더 심하며 하류층 여성들이 비교적 더 자유로웠다. 1000년 전 우리 전통사회서는 거의 귀족층이나 양반계층에 해당되었고, 평민이나 노비 계층은 남녀 간에 평등했으며 개방적이었다.

*남존여비 현상의 원인은 한마디로 ‘남자가 힘이 세기 때문’이다.

사회다운 사회가 제대로 성립하기 시작할 무렵. 사람들은 서로 협력해서 사회를 만들어간다. 문제는 현대사회와는 달리 원시사회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서 남성의 근력이나 근육량 등이 훨씬 더 중요했고 당연히 근육량이 많은 남자가 우위에 설 수밖에 없었다. ‘남존여비’의 결정적인 원인은 남성이 근력이 세고 여성은 상대적으로 약하므로 전투원으로서 '남자가 여자를 지켜야지'라는 관점이다. 남성이 효율적인 것은 당연한 것이 되고, 동시에 '남성이 근력이 세니까 더 많은 책임을 짊어지게 된다'라는 개념이다. 한국에서는 남성의 군대 징용이 가장 대표적이며, 넓게 보면 목숨이 위험할 때 가급적이면 노약자나 여성, 어린아이 등을 보호하는 것이나 '레이디 퍼스트' 등의 의무감 책임감의 부담을 지게 된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남존여비가 심각해진 것은 조선 중 후반기에 들어서다. 오히려 고대 및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딸은 상속에서 차별대우를 전혀 받지 않았고 부모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며 데릴사위제도(사위의 처가살이)가 흔한 관습이기도 했다. 한 예로 조선 중기 인물인 율곡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의 집인 외가에서 자랐다. 처첩제도가 일반화된 것도 조선 시대 중후반 들어서다. 고려 조기에는 처첩제를 제안한 ‘박유’라는 관료가 길에서 여성들에게 뭇매를 맞았다고 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의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남성에 비해 지극히 열등했는데 “여성은 알게 할 것이 없고 다만 따르게 할 뿐이다”라는 유교적 이념이 근본이었다.(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등)

* 한국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남존여비 심화

한국에서 부계친족제도가 강화되고 남존여비 사상이 깊게 뿌리를 내린 것은 임진왜란 이후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전쟁으로 인한 경제 핍박, 가정의 파괴와 성 관념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조처, 혼인 이후 거처의 변화에 따른 여권의 하락, 양반 지주의 토지 확대 정체에 따른 장자상속제로의 이행 여파 등, 다양한 원인이 등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수백 년에서 길게는 수천 년간 진행되면서 ‘남존여비’ 사상은 자연스럽게 정착하게 된 것이다.

현대에 와서야 많은 국가에서 남존여비 사상이 사라졌다. 선진국의 경우에는 인권에 대한 관심과 여성 운동이 발달하면서 남존여비라고 할 만한 제도나 문화는 거의 다 없어졌다. 공산권 국가들은 공산주의 자체가 인민의 평등을 추구하기 때문에 남존여비 사상을 완전히 버렸다.

* 호주제의 폐지는 남녀평등의 기폭제

한국은 90년대까지도 제도적 문화적인 남존여비가 없지 않았다. 여학생들에게만 순결교육이 계속되었고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인식 등에서 확실히 미비했지만, 2005년 호주제 폐지는 여성의 교육과 경제 사회활동 등 모든 여권 신장을 비약발전시키는 동력이 됐다. 이로 인한 여성 전체 지위나 여권의 급신장은 임진왜란 이후, 500년을 지겹게 이어온 '남존여비'의 종막과 함께 오히려 2019년 한국은 '여존남비(페미니즘)'가 구가되는 21세기 문턱으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