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 익는 가을 스케치
수수 익는 가을 스케치
  • 이원선 기자
  • 승인 2019.09.23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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껑충하게 큰 키에 붉은 열매를 맺은 수수는 돌떡으로 제일감이다.
중국에서 수수는 ‘마오타이’라는 술의 주원료다.
수수밭의 붉은 색과 논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이원선 기자
수수밭의 붉은 색과 논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원선 기자

추분을 이틀 앞둔(921)새벽길에 귀뚜라미울음이 자자구구하다. 언제부터 저리도 애달프게 울었을까? 밤새껏 울어 이제는 그칠 법도 한데 연신 암컷을 찾는 날개는 부서지는 줄도 모르게 귀뚤거리고 가을을 찾는 나그네의 발걸음은 실없이 분주하다. 이불속에서 가을에 묻힐 것을 무엇을 찾아 나선 참인가?

누가 부르지도 않건만 이미 나선 길이다. 이마가 서늘한 새벽나절의 하모니에 귀를 기울이며 쳐다보는 하늘은 태풍 소식에 미리 겁을 집어 먹은 듯 구름무리가 머흘(험하고 사납다.)고 틈틈이 흩뿌린 빗방울이 타일에 번들거린다.

동리의 어르신께서 수수의 작황을 살펴보고 있다. 이원선 기자
동리의 어르신께서 수수의 작황을 살펴보고 있다. 이원선 기자

곧장 새벽을 달려 찾은 곳은 안동시 남후면의 작은 시골마을이다. 구름을 뚫은 은은한 햇살이 어둠을 물리자 이른 가을의 풍경이 노랗게 마음을 후린다. 가을의 색은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소박하지도 않아 은근하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을 지녔다.

짙은 녹색이 연두색으로 변해가는 중에 노란색이 은은하게 배어나는 들녘이다. 참새 떼가 이른 아침을 때운 자리로 아침이슬을 함초롬 머금은 연분홍코스모스가 하느작거리고 제법 고개를 숙인 벼이삭이 마음에 풍요롭다. 뽀얗게 흐드러진 메밀밭이 이효석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금밭을 닮았다.

간간히 보이는 메밀밭이 더 없이 아름답다. 이원선 기자
간간히 보이는 메밀밭이 더 없이 아름답다. 이원선 기자

외지인이 들녘을 오르내리며 오락가락 길을 잃은 듯 멈칫거리자 지나가는 할머니께서 이 새벽에 뭐 볼 것 있어서하며 살갑게 말을 붙인다. “풍경이 좋네요!”하는데 쓴웃음을 대답으로 혹여 방해가 될까 싶어선지 저만치에서 휘적휘적 걸음을 재촉하신다.

이 마을을 찾은 목적은 수꾸(수수 : 길이가 1m, 나비는 5cm 정도로 잎이 크다. 중륵이 희고 뚜렷하며 엽이는 없고 엽설은 흑갈색의 환장막편이며, 입모가 있다.)밭을 보기 위함이다. 어릴 적 밭의 한 귀퉁이나 밭두렁에서 종종 보던 수수다. 헌데 어느 때 부턴가 귀한 작물이 되어 잘 볼 수가 없었다. 그 수수가 이 마을에선 지천이다.

가을색이 스멀스멀 들녘을 메우는 중에 수수의 붉은 색은 단연 이국적이다. 여름철 태양빛을 오지게도 먹은 모양이다. 속으로, 속으로 인내하며 갈무리하던 것을 영롱한 아침이슬에 취에 오롯이 토해내고 있는 중이다. 토실토실하게 영글어 툭툭 불거지는 알알이 흡사 옥수수를 튀긴 팝콘 같아 손을 뻗어 입에 오물거리고 싶다.

고개를 숙여 익어가는 벼이삭. 이원선 기자
고개를 숙여 익어가는 벼이삭. 이원선 기자

수수는 키가 큰 작물이다. 껑충하게 큰 키에 붉은 열매를 맺은 수수는 돌떡으로 제일감이다. 키가 크다보니 쑥쑥 자랐으면 하는 마음과 세상에 나아가 무리의 수장이 되어달라는 염원을 담은 떡이기 때문이다. 동리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아이의 축복을 빌고 질병으로부터 안전하기를 바라며 잡신의 근접을 경계하는 마음으로 먹는 붉은색의 수수떡은 일종의 기복사상과 샤머니즘(shamanism:초자연적인 존재와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샤먼을 중심으로 하는 주술이나 종교이다.)을 내포한 음식이기도 하다. 그런 탓에 시골의 옛적에는 없어서는 안 될 작물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수수가 농촌의 서민적인 작물이라면 중국에서는 마오타이라는 술의 주원료다.

장이머우가 감독하고 공리, 강문, 계춘화 등등 열연한 '붉은 수수밭'은 18살의 어여쁜 추알(공리 분)이 나귀 한 마리에 양조장 주인인 리서방(50세의 독신 남)에게 팔려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가차 없이 내리쬐는 햇볕으로 가마꾼들의 벗은 상체 그리고 붉은 수수밭, 친정으로 가는 산행 길에서 추알은 가마꾼 유이찬아오에게 겁탈을 당하고 만다. 그 후 남편이 살해되고 추알은 양조장을 재건하지만 유이찬아오가 나타나 고량주에 오줌을 누는 등 주인행세를 하지만 고스란히 당하고 만다.

논두렁에서 피빛 정열을 불태우는 유홍초 부부. 이원선 기자
논두렁에서 피빛 정열을 불태우는 유홍초 부부. 이원선 기자

그러던 어느 날 일본군이 들어 닥치고 유이찬아오는 늙은 일꾼 라호안과 함께 사라진다. 그로부터 9년 후 일본군이 들어오자 마릉 마을의 평화는 깨지고 게릴라로 활동하던 라호안은 산 채로 잡혀 가죽이 벗겨지는 고통 속에 죽고 만다. 분노한 주민들이 고량주를 이용하여 기관포를 앞세운 일본군에 대항하지만 역부족이다. 그 와중에 추알은 일본군의 쏘아대는 기관총 세례에 쓰러지고 수수밭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여 피로 물든다. 그때 불사조처럼 유이찬아오의 부자가 나타난다. 그리고 때마침 떠오른 핏빛의 붉은 해가 그들의 머리위에서 이글거린다.

알알이 영글어 가는 수수. 이원선 기자
알알이 영글어 가는 수수. 이원선 기자

어머니가 돌절구에 콩콩 빻고 올 고운체로 스렁 스르렁흔들어 시루에 켜켜이 쌓은 뒤 장작불로 김을 올려 뭉근하게 쩌 주시던 수수떡, 찰기가 지나쳐 찹쌀떡처럼 손에 끈적거렸지만 쫀득하고 구수하던 그 맛은 입안서 기가 막혔다. 아직도 그 돌절구는 마당 끝에서 여전한데 삼베 적삼에 땀내 진하던 어머님의 자취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어 두루뭉술한 수수열매가 더 애잖아 보인다.

그날 모락모락 오르는 김처럼 수수밭이 가을을 재촉하는 바람에 서걱서걱소리 내어 일렁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