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진 은행 열매를 보며
떨어진 은행 열매를 보며
  • 이화진 기자
  • 승인 2022.09.24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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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기용은 권력자의 중요한 덕목
은퇴 후에도 존경받는 지도자 가지고파

凋落의 계절이 오고 있다. 여름 한철에 이어 이른 가을 동안 초록 잎사귀를 매단 나무들은 이제 그들을 하나둘씩 땅으로 쏟아낼 채비를 하고 있다. 지상에 떨어지기 전, 가지에 매달린 여러 빛깔의 잎들은 이를 바라보는 사람에게 싱그러운 녹음 못잖은 찬미의 함성을 지르게 한다. 좀 더 긴 시간 동안 고운 색깔로 남아 사람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잎을 위한 배려에서일까? 나무는 단풍을 선보이기 훨씬 전 열매를 거의 땅 위로 쏟아낸다. 인적 없는 깊은 산속에 자라면서 열매를 잎보다 먼저 떨어뜨리는 樹種도 있겠지만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나무들로는 밤나무, 참나무, 은행나무가있다. 세 나무는 각기 열매를 내려놓는 시기가 전국으로 볼 때 다소 차이가 있겠으나 대개 9월 중순 무렵에 시작하여 10월 중순쯤에 이른다.잎이 가을 색을 드러낼 무렵, 3종의 열매 중 나무에 달려 있을 때 가장 돋보이는 건 은행나무 열매다. 가로를 거닐다 그 열매에 눈길이 쏠리곤 한다. 노랗게 물들고 있는 구슬 모양의 열매를 보고 무덤덤하게 지나칠 수 없다. 여름철엔 성긴 청포도 송이처럼 보이다 가을이 익어가면 알알이 굵어진 송이는 잎 색처럼 연노랑 빛깔로 물든다.

산야의 초목이 가을 채색으로 단장해도 은행잎은 아직 단풍의 색깔을 완연히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데도 은행나무는 훨씬 전부터 황금빛 송이에 박힌 알들을 하나둘씩 땅 위에 떨구어 놓는다. 날이 갈수록 더 쏟아져 나무 아래 수북이 쌓이는 곳도 있다. 한때 은행알을 약재로 쓰겠다며 주워가는 이들이 있었으나 요즘은 시내의 보도에 떨어져 있는 열매를 주워 가는 이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 발길에 짓이겨지면 시큼한 구린내로 후각을 불쾌하게 하고 길바닥에 터져 엉겨 붙은 잔해는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지러이 흩어진 열매를 치우는 환경미화원들의 수고를 더 할 뿐이다

나무에 매달린 은행알이 황금빛을 발할 때, 한 번쯤 우러러보는 이가 있었을 것이다. 떨어져 발길에 차이거나 밟히면 영락없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하고 만다. 그와는 달리 나무에 달린 밤송이나 도토리는 은행알만큼 시선을 끌지 못하나, 잘 여물어 떨어지면 지나는 사람의 시선을 붙잡는다.

우리 인간 세상으로 눈길을 돌려보자. 권력의 정점에 있을 적, 일부 유권자의 추앙을 받으며 일정한 지지율을 보이다 물러난 국내 정치 지도자들은 어떠하였는가? 그들 중 재임 시에 최고 권력자에게 파고들기 쉬운 이권 개입, 청탁, 뇌물수수 등을 비롯한 여타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던 지도자가 이 나라에 몇이나 있었던가?

유감스럽게도 이 나라의 국가 최고 권력자는 몇몇을 제외하고 대개 주변 인물을 잘 다스리지 못하였다. 그런 권력자의 주변에 있었던 피붙이나 측근들은 호가호위하면서 크든 작든 이권에 개입하였거나 황금으로 유혹하는 부나비들의 청탁을 물리치지 못하고 비리를 저질러 언론의 조명을 받았음을 우리는 흔히 보았다.

중앙이든 지방이든 조직의 규모가 크든 작든 조직의 꼭대기에 있었던 이들 중 주변을 잘 닦달하지 못한 이나 황금에 탐닉한 이가 더러 있었다. 이들이 권력을 내려놓게 되면 가로에 떨어진 은행 열매와 같은 처지로 전락하기 쉽다. 엄청난 비리가 불거져 재임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도 더러 있었다.  국가 최고 권력자로 물러난 후에도 재직 중의 청렴함으로 국민의 진심 어린 사랑을 받는 지도자를 두 손가락으로 꼽기 어렵다. 경제 대국 십몇 위의 국가 위상에 비춰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권좌에서 물러난 이들이 재직 중 구린내 대신 향기를 냈다면 그들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외국의 경우 원한을 살 정도의 政敵을 만들지 않고 청백함을 지켜 국민의 사랑을 받는 최고 지도자가 드물겠지만 분명 있으리라 생각된다. 경호원 없이 홀로 공원을 산책하거나, 식당을 이용하거나 대중교통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국가의 대통령이나 수상과 그런 대통령이나 수상을 가진 나라의 국민이 부럽기만 하다.

자리에 있을 적 훌륭한 지도력이 그 자리를 떠나고 난 뒤에도 빛을 발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이 나라의 정치사에는 그런 정치인이 구미 여러 나라에 비해 매우 드물었다. 권좌에 있을 때는 물론 내려와도 떨어진 도토리나 밤처럼 반기려 드는 지도자를 가진 나라로 거듭날 수 없을까? 떨어진 은행 열매를 보며 그런 지도자의 출현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