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5대 궁궐을 찾아서 (3) 경복궁
조선시대 5대 궁궐을 찾아서 (3) 경복궁
  • 박미정 기자
  • 승인 2022.03.10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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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5대 궁궐의 하나
경복궁을 가다
경복궁 근정문이 아름답다. 박미정 기자
경복궁 근정문이 아름답다. 박미정 기자

 

경복궁(景福宮)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청와대로에 있는 조선 왕조의 법궁이다. 태조 4년인 1395년에 창건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어 1868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증건되었다. 사적 제117호로 면적 432,703㎡이다. 일제 강점기에 훼손되어 현재 복원사업이 진행중이다. 

경복궁 입구 길게 늘어선 전각들. 박미정 기자
경복궁 입구 길게 늘어선 전각들. 박미정 기자
경복궁 근정전이 멋스럽다. 박미정 기자
경복궁 근정전이 멋스럽다. 박미정 기자

 

조선건국과 함께 세운 경복궁은 세월을 지나며 그 규모를 확장했다. 특히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위엄을 되찾고 왕조의 만세를 기원하며 궁을 증건했다. 고종 때 기록에 의하면 경복궁에는 500여 동의 건물이 있었다. 조선의 수도인 한양은 백악산, 목멱산, 타락산, 인왕산을 경계로 하고 있으며, 백악산 아래 법궁인 경복궁 이외의 다른 궁궐들도 이후에 조성되었다. 왕은 시대적 상황이나 필요에 따라 여러 궁궐을 옮겨 가며 사용했다. 

경복궁 전각앞에 향로가 운치를 더한다. 박미정 기자
경복궁 전각앞에 향로가 운치를 더한다. 박미정 기자

 

조선왕조 제일의 법궁인 경복궁은 1553년 대화재로 주요 전각들이 소실되어 재건되었으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전각들이 철거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1990년부터 복원 정화 사업이 추진되어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을 차례로 지나면 근정전이 나온다. 그 뒤로 편전인 사정전, 침전인 강녕전과 교태전이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 왕세자의 처소인 자선당과 대비의 처소 자경전이 있다.

경복궁 오랜세월을 견뎌낸 문살이 고풍스럽다. 박미정 기자
경복궁 오랜세월을 견뎌낸 문살이 고풍스럽다. 박미정 기자
경복궁을 방문한 여행객이 한복을 곱게 입고 있다. 박미정 기자
경복궁을 방문한 여행객이 한복을 곱게 입고 있다. 박미정 기자

 

강녕전과 교태전의 독특한 점은 지붕에 용마루가 없다. 이미 용인 왕이 있는데 그 위에 다른 용을 세워 왕을 누르는 것이 불경스럽다는 이유로 용마루를 설치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또한 조정 마당 가운데 국왕이 다니는 어도와 신화가 다니는 신도가 있다. 그 양옆에는 품계석이 있어 동쪽에는 문관이, 서쪽에는 무관이 섰다. 마당은 울퉁불퉁하고 거친 박석으로 만들어 눈부심을 막아주고 미끄러지지 않도록 했다. 

전각의 지붕에는 재앙을 막고자 흙으로 만든 동물 형상의 잡상을 올렸다. 잡상은 손오공 서유기의 등장인물에서 유래하였으며, 그 수는 전각마다 다르다. 경희루에는 궁궐 건물 중 가장 많은 11개의 잡상이 있다.

경복궁 지붕위의 잡상들. 박미정 기자
경복궁 지붕위의 잡상들. 박미정 기자

 

경희루는 조선시대에 연회를 하던 곳으로 1985년 대한민국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근정전 서편에 위치한 누각으로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는 등 국가 행사에 사용하던 건물이다. 연못안에 석재 기단부, 정면 7칸, 측면 5칸의 목조 중루와 팔작지붕을 갖춘 무출목 이익공계(二翼工系)의 구조이다. 경희루 풍경은 경복궁 안에서도 백미로 뽑혀 만원권 구권의 뒷면 도안으로 나오기도 한 상징적 건물이다. 우리나라에서 단일 평면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누각으로 간결하면서도 호화롭게 장식한 조선 후기 누각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다. 

경복궁 경희루 야경이 아름답다. 한국관광공사
경복궁 경희루 야경이 아름답다. 한국관광공사

 

건청궁은 경복궁 속의 또 다른 궁으로 1873년 고종이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정치적으로 자립하기 위해 만든 공간이다. 1884년부터 고종이 기거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약 10년간 외교활동의 주무대가 되었다. 고종은 이 기간동안 신문물을 수용하고 근대화를 도모했다. 고종은 정안당에서, 명성황후는 곤령합에서 기거했다. 1895년 일본 공사관 직원, 일본 군인 등이 반일 세력의 중심인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시신을 녹산에서 불태운 '을미사변'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이후 신변의 위협에 시달리던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고(아관파천), 서재였던 관문각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들은 모두 1909년에 헐렸다. 현재의 모습은 2007년에 복원되었다.

경복궁 안내 표지판. 박미정 기자
경복궁 안내 표지판. 박미정 기자

 

집옥재는 팔우정 협길당과 복도를 통해 연결되어 있는 전각으로 황실 도서관이자 외국 사절의 접견 장소로 사용되었다. 가운데의 집옥재는 서양의 양식으로 동쪽의 협길당은 조선의 양식으로 지었다. 보물 제1761호인 향원정은 정육각형 모양의 2층 정자로 1867~1873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연못 안 인공섬에 지어져 건궁청에서부터 취향교라는 다리로 연결되는데 고종은 이곳에서 종종 산책을 즐겼다.

경복궁 수문장 의식이 눈길을 끈다. 박미정 기자
경복궁 수문장 의식이 눈길을 끈다. 박미정 기자

 

문화재청은 2010년부터 1차 정비사업을 통해 89동의 건물을 복원했고, 2011년부터 2045년까지 2차 정비사업으로 80동을 복원할 계획이다. 

조선의 궁궐 경복궁은 정치와 문화의 중심이자 왕실 가족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한 나라의 도성에서 중요한 위치를 치지했다. 조선은 유교적 정치이념과 풍수지리 사상에 바탕하여 수도와 궁궐터를 정했다.

경복궁 근정문 단청이 아름답다. 박미정 기자
경복궁 근정문 단청이 아름답다. 박미정 기자

 

조선왕조 개국공신 정도전은 태조의 명에 따라 경복궁이라는 궁궐 이름을 비롯해 강녕전, 교태전, 연생전, 근정정 등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었다. 경복궁(景福宮)에는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경복궁 수문장 의식이 진행되고 있다. 박미정 기자
경복궁 수문장 의식이 진행되고 있다. 박미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