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5대 궁궐을 찾아서] (5) 창덕궁
[조선시대 5대 궁궐을 찾아서] (5) 창덕궁
  • 박미정 기자
  • 승인 2022.03.17 08: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시대 5대 궁궐의 하나
창덕궁을 가다
창덕궁 인정전 전경. 박미정 기자
창덕궁 인정전. 박미정 기자

 

창덕궁(昌德宮•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은 조선 제3대 임금인 태종에 의해 1405년에 완공된 조선왕조의 두번 째 궁궐이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모든 궁궐이 소실되었을 때 곧바로 재건되었다. 19세기 경복궁이 재건되기 전까지 경복궁을 대신하여 실질적인 법궁 역할을 했다. 

창덕궁 전각들이 아름답다. 박미정 기자
창덕궁 전각들. 박미정 기자

 

창덕궁(사적 제122호)의 전각들은 자연 형세에 따라 자연스럽게 배치되었다. 뒤로는 아름다운 후원이 조성되어 비교적 그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자연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독특한 공간 구성을 인정 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창덕궁 인정문. 박미정 기자
창덕궁 전각이 멋스럽다. 박미정 기자

 

창덕궁에는 왕실과 직접 관련이 있는 여러 관청이 있는데 이를 '궐내각사(闕內各司)'라 하였다. 그 가운데 정치를 보좌하는 홍문관과 건강을 살피는 내의원, 정신문화를 담당하는 군장각, 왕의 칙령과 교서를 보관하던 예문관 등이 있다. 대부분 건물들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소실되었다가 복원되었다. 아픈 민족의 역사다. 궐내각사 중심에는 금천을 경계로 각 관청들이 밀집되어 미로와 같이 구성되었다. 

창덕궁 어좌가 화려하다. 박미정 기자
창덕궁 어좌가 화려하다. 박미정 기자

 

창덕궁에서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궁궐인 희정당(熙政堂•보불 제815호)은 주로 국왕의 침전으로 사용되다가 이후 선정전(宣政殿)을 대신해 편전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인정전(仁政展)은 신하들이 임금에게 문안을 드리고 정사를 아뢰며,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등 중요한 국가 의식이 행하여진 궁궐이다. 낙선재(樂善齋•보물 제1764호)는 조선 24대 헌종이 경빈을 맞은 곳이다. 헌종의 서재이자 사랑채로 단청을 하지 않은게 특징이다. 또한 대조전(大趙展)은 침전으로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이었으며 큰 잔치가 열린 곳이다. 1910년 이곳에서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를 결정했던 비운의 장소이다. 마지막 왕비였던 순정황후의 거처로 해방 후까지 사용한 곳으로 고유한 장식과 벽화, 문살이 남아 있다.

창덕궁 회화나무가 멋스럽다. 박미정 기자
창덕궁 회화나무가 눈길을 끈다. 박미정 기자

 

창경궁의 주요 전각 뒤쪽으로는 숲, 연못, 정자 등이 잘 어우러져 아름다운 후원이 펼쳐져 있다. 창덕궁의 후원은 '북원', '금원', '상림'이라고도 불리다가 1894년 새로 생긴 후 후원 관리 관청에 따라 '비원'이라고 하였다. 후원은 국왕과 그 가족들이 휴식을 취하고, 학문을 연마하는 동시에 국왕이 신하들과 시를 지으며 문예활동을 펼친 곳이기도 했다.

창덕궁 부용정 전경. 게티이미지뱅크
창덕궁 부용정 전경. 게티이미지뱅크

 

후원 초입의 '부용정(芙蓉亭)'은 정조대 현재 모습으로 조성된 곳으로, 정조는 이곳에서 신하들과 학문을 논하고 낚시를 하거나 활쏘기 모임을 열어 군신간의 화합을 다졌다. 또한 과거 시험을 열어 국가의 인재를 선발하기도 했다. 

창덕궁 인?문. 박미정 기자
창덕궁 인정문. 박미정 기자

 

문화재청은 창덕궁의 보존과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정부기관으로 창덕궁의 건물 및 시설을 보수정비, 발굴, 예산 지원 등의 업무를 총괄한다. 또한 40여 명 가량의 직원이 배치된 창덕궁관리소는 현장에서 직접 유산을 관리하고 있다. 창덕궁 보존의 가장 큰 위협 요소는 목조건축물의 화재 위험이다. 이와 관련해 문화재청은 2009년부터 5대궁 및 종묘종합경비시스템구축사업을 추진하여 화재를 비롯한 문화재 훼손과 재난에 대비하고 있다.

창덕궁 안내문이 보인다. 박미정 기자.
창덕궁 안내문이 보인다. 박미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