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실(齋室) 이야기] 달성 옥포 기세마을 충주 석씨 '인산당'
[재실(齋室) 이야기] 달성 옥포 기세마을 충주 석씨 '인산당'
  • 우남희 기자
  • 승인 2021.04.16 1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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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석언우 선생 추모하는 인산당
바로 이웃한 곳엔 후학 양성의 장 소계정

달성군 옥포읍 기세리에는 전국적인 명소로 알려진 송해공원이 있다.

황해도 출신인 송해선생의 이름으로 공원이 조성된 것은 처갓집이 이 동네에 있기 때문이다. 그의 처는 충주 석씨이며 이곳 기세리는 충주 석씨의 집성촌이다.

달성군 옥포읍에 있는 기세리 마을 표지석  우남희 기자
달성군 옥포읍 기세리 마을 표지석. 우남희 기자

충주 석씨의 시조 휘는 린(鄰)으로 송나라 소흥 연간(1131~1162)에 고려에 임시로 거처하여 살다 조위총을 토벌한 공훈으로 예성군에 봉해졌다. 예성은 충주의 옛 이름으로 자손들이 이곳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기세리의 입향조는 시조 석린의 16세손인 인산 석언우(1576~1609) 선생이다. 선생을 추모하고 일가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지은 재실이 인산당(仁山堂)으로 충주 석씨 대종당(大宗堂)이다.

선생은 경남 밀양에서 아버지 석세경과 어머니 연안김씨 사이에서 태어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7세의 나이에 창의로 활약하고 정난 후에는 산수가 수려한 비슬산 인수동에 살다 지금의 기세리에 정착했는데 그의 후손 및 일족들이 지금까지 400여 년 동안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인산당은 그의 아들 송암(松菴) 석운상이 서울 성균관에서 유학할 때 광해군의 그릇된 정치로 과거에 대한 뜻을 버리고 기세리 남쪽 달도산 중숭봉(重崇峯) 아래로 귀향하여 지은 건물로 오랜 세월에 퇴락하여 그 이름만 남았었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대종들이 1952년, 흉년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뜻을 모아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평기와 집으로 중건하였다.

정면에 인산당이라는 편액을 걸고, 오른쪽에 송암정사(松菴精舍)와 왼쪽에 육영헌(育英軒)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송암정사는 효성으로 어버이의 마음을 받들었던 송암선생을 사모한다는 뜻이고 육영헌은 선생의 문하생들이 자발적으로 스승의 고귀한 뜻을 기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서당, 회의장, 방문객 접빈장소다. 2칸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방을 두고 앞쪽으로 툇간을 둔 평범한 중당협실형 구성이며 우측 방 측면과 배면 쪽에 툇마루를 두었다.

기세리 충주 석씨 재실인 인산당  우남희기자
기세리 충주 석씨 재실인 인산당. 우남희 기자

인산당에 걸린 주련을 통해 터를 잡은 이곳 기세리가 달도산자락의 양지 바른 곳이라는 것과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며 자손들의 번창함을 기원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積歲經營肯構堂 오랜 세월 경영할 서당터를 잡았으니

文明淑氣道山陽 문명 맑은 기운 도산의 양지쪽이라네

活水抱軒開寶鑑 힘찬 물줄기 집을 감싸 보감을 열었네

栽培花樹無窮樂 꽃과 나무 재배하니 한 없이 즐겁구나

玉葉金枝永世長 금쪽같은 자손들이 영원무궁 이어지기를.

 

▶소계정

인산당과 바로 이웃한 곳에 대구광역시 문화재 자료 31호로 지정된 소계정이 있다. 제자들이 함영계(含英契)를 모아 건립한 소계정은 일제강점기 때 소계 석재준 선생(1866~1945)이 후학들을 양성하던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건물로 가운데 대청, 양 옆에 방을 두고 전면으로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둔 영남지방의 전형적인 정자 형태를 취하고 있다.

소계 석재준 선생 영정. 우남희 기자
소계 석재준 선생 영정. 우남희 기자

선생은 아버지 지지당 석치규와 어머니 파평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로부터 수업 받고 15세가 되어서는 만긍와(晩兢窩) 윤태로에게 과거공부를 배웠다. 당시 과거제도의 혼탁함을 보고 ‘이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이 될 수 없으니 성학(聖學)으로 정심수기(正心修己)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며 단념하고 사사로 학문을 익히고 바르게 나아가고자 했다.

1891년 관이 주도하는 경학원의 강의에서 독법과 문의에 조금도 차질이 없어 강장인 임제(臨齋) 서찬규(徐贊圭), 관찰사 이헌영, 군수 김영호(金榮浩), 원로선비 이희익 등이 큰 선비라고 극찬하였다. 학자이자 순국지사인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을 배종(陪從)하고 낙동정사에서 대학의 경의 1장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1908년 학행으로 장능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경술국치에 북향통곡하고 두문불출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원근지역에서 수업을 청하나 다 수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소계선생의 증손자이자 前 宗長이신 석창순님이 소계정을 소개하고 있다. 우남희 기자
소계선생의 증손자이자 전 종장(宗長)이신 석창순님이 소계정을 소개하고 있다. 우남희 기자

나라가 망하고 도가 사라진 암흑기에 그는 오직 유학을 진작시켜 민족도의를 일깨우는 은사로서 혼신의 정열을 불태워 오늘날 후세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경술국치의 변고를 듣고 통곡하며 쓴 선생의 우국충절의 시 한 편을 전한다.

-庚戌年 聞屋社之變痛哭-

龔勝絶食非徒死 공승이 식음을 끊음이 헛된 죽음이 아니고

陶今歸田豈苟生 도잠이 전원으로 돌아감이 어찌 구차한 삶이랴

一死一生惟義在 죽고 삶이 오직 의에 달렸으니

千秋評論敢誰輕 천추의 평론 누가 감히 가벼이 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