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시인의 삶과 흔적을 더듬어 봄
할아버지가/ 담뱃대를 물고/ 들에 나가시니/ 궂은 날도/ 곱게 개이고/ 할아버지가/ 도롱이를 입고/ 들에 나가시니/ 가문 날도/ 비가 오시네.(할아버지, 정지용)
정지용 생가에 걸려 있는 동시다. 동심엔 할아버지가 전능자로 보인다. 할아버지는 육체적으로 쇠약하셔도 정신력으로 보완하실 것이다.
노인 한 사람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거라고 한다. 노인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이도 있다. 시니어 세대의 경륜은 소중하다.
정지용(鄭芝溶)생가는 교동저수지에서 흘러내린 실개천이 집앞으로 흐르고 있는 옥천군 옥천읍 향수길 56번지에 있다. 그의 본래 생가는 1974년에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다른 집이 들어섰으나, 해금조치 직후 조직된 지용회를 중심으로 1996년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됐다.
시인 정지용(1902~1950)은 실개천이 흐르는 옥천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명(兒名)은 태몽에서 유래된 지용(池龍)이고 세례명은 프란시스코이다. 시인은 이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생가에서 조금 떨어진 옥천공립보통학교에 다녔으며, 12세때 결혼을 하고, 17세때 휘문고에 입학하여 학예부장, 편집위원 등을 지내며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발휘했다. 그러다가 22세때 일본으로 건너가 도시샤대학에서 6년동안 공부를 했다.
그 후 국내에 돌아와 휘문고 교사, 「가톨릭 청년」편집고문, 「시와소설」 간행일을 맡았다. 해방 후에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이화여대, 서울대에 출강을 함과 동시에 시, 수필, 평론을 발표 했지만 6.25전쟁이 발발하여 납북되어 우리 문학사에서 소외 되었다가 1980년대 후반에 해금조치되어 비로소 독자들에게 읽힐 수 있게 됐다.
생가는 옥천읍내 구읍사거리에서 육영수생가지 방면으로 직진하여 청석교를 건너면 ‘향수'를 새겨 놓은 시비와 생가 안내판이 있는 생가에 이르게 된다. 생가 앞 청석교 아래는 여전히 ‘향수'의 서두를 장식하는 실개천이 흐르고 있으나 상상속의 시골 개울이 아니라 현대식 콘크리벽 개천으로 변해 있었지만 흐르는 물은 예전과 같이 맑다.
정지용 생가는 초가집 처마곡선이 아름다운 본채와 아래채로 이루어져 단아하다. 본채에는 방이 2개 있는데 방문객이 방안을 훤히 볼수 있도록 문을 개방해서 방 한켠에 그의 아버지가 한약방할때 사용하던 약장(藥欌) 및 가구(家具)가 있다.
먼저 좌측방 벽면에 걸려 있는 그의 초상화 우측에는 문학소녀 시절 애창하던 ‘호수’ 시가 액자로 걸려 있고, 초상화 좌측에 걸려 있는 ‘할아버지’ 시에서는 천진난만한 그의 동심을 읽을수 있다. 우측방에는 ‘향수'의 시어 따라 방안에 배치된 소품 질화로와 등잔을 보면서 방문객들은 다시금 ‘향수'를 음미할 수 있다.
생가는 실개천 도로쪽에서 들어가는 사립문과 문학관쪽에서 들어가는 두개의 사립문이 있다.
마당을 보면 일반 가정에서는 보통 장독대는 뒤란에 위치하나, 이곳 장독대는 우물가 담장 밑에 다소곳하다. 또 우물 옆의 낮은 굴뚝도 특이하다. 뒤란에 두는 것이 보통이나, 어쩐지 이곳은 우물가 옆이다. 낮은 굴뚝의 연기는 여름철 모기불 역할을 하면서 바로 흩어지지 않고 집 마당을 휘돌아 나간다
‘향수’는 시인이 일본에 유학갈 때 고향을 그리며 쓴 시로 1927년 「조선지광」에 발표했다. 한가로운 고향의 정경을 통하여 한 폭의 풍경화처럼 생생하게 그려낸 그의 모더니즘 시의 대표작이다. 우리들의 가슴에 새겨진 고향의 정경을 오롯하게 담아냈으며 이동원, 박인수의 노래로 다시 태어나 더욱 사랑을 받게 되면서 정지용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민시인이 되고 잊혀져 가던 고향의 정경은 이 노래로 인하여 다시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