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3건) 리스트형 웹진형 타일형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㊸골목길과 논길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㊸골목길과 논길 소평(少坪)마을의 규모는 동서로 약 500m, 남북으로 약 400m가 될까 싶은 면적의 글자 그대로 ‘적을 소, 평(땅의 면적) 평’으로 ‘평수가 적은 동네’였다. 마을은 육지 속의 섬으로 짙은 초록빛 보리가 바람에 출렁일 때와 모내기를 앞두고 논마다 물이 가득 차 있으면 한층 그런 느낌이었다. 장마에 태풍으로 큰물이 밀려들면 마을 앞 들판은 거대한 호수로 변하고 골목길은 수로가 되어 황톳물을 마당으로 끌어들였다.섬사람들이 그러하듯 소평마을 사람들은 새마을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자조, 자립, 협동정신이 강했다. 농사일은 물론이고, 테마 기획 | 정재용 기자 | cjaey@naver.com | 2021-03-05 17:00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㊷장산댁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㊷장산댁 장산댁은 임철조 씨의 택호였다. 그에게는 구광본이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그를 장산댁 아니면 ‘광본이 엄마’로 불렀다. 전통사회에서 결혼한 여성의 이름은 없었다. 택호 아니면 남편 이름의 처(妻), 아이 이름의 엄마였다. “평생을 함께 살아도 시어머니 이름 모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자식 기르며 이름 없이 살다가, 죽어서도 명정이나 상석(床石)에 본관(本貫)과 성씨만 남겼다.유일하게 여성의 이름을 불러주는 데는 교회였다. 장산댁은 소평교회 “임철조 집사”였다. 임 집사는 구정순(명동댁, 맹동댁), 테마 기획 | 정재용 기자 | cjaey@naver.com | 2021-02-16 10:00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⑫내가 살던 고향은 벼꽃 피는 들판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⑫내가 살던 고향은 벼꽃 피는 들판 소평마을은 집주인 마음을 닮은 소박한 가옥 쉰 채가 박태기나무에 꽃 달리듯 골목길 따라 사이좋게 붙어 있었다. 골목은 실핏줄처럼 얽혀있어 아이들이 '붙잡을 놀이’하기 좋았고 가끔 오는 엿, 과일, 식혜(젓갈) 장수는 물건 팔기 좋았다. 하지만 마을을 벗어나면 사방이 논이라서 육지 속 외딴 섬이었다. 모내기를 앞두고 논마다 물이 가득하고, 형산강 범람으로 홍수를 이루고, 보리가 패고 벼가 푸른빛을 띨 때면 정말 섬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안강읍 소재지에서 2km 정도 떨어져 있고 가깝다는 양동마을, 황새마을도 그 정도 멀었다. 한국전력 테마 기획 | 정재용 기자 | cjaey@naver.com | 2019-09-12 16:54 처음처음1끝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