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㊸골목길과 논길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㊸골목길과 논길
  • 정재용 기자
  • 승인 2021.03.05 17: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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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지에 황토색 크레파스 하나로 그린 듯
평지에 구불구불

소평(少坪)마을의 규모는 동서로 약 500m, 남북으로 약 400m가 될까 싶은 면적의 글자 그대로 ‘적을 소, 평(땅의 면적) 평’으로 ‘평수가 적은 동네’였다. 마을은 육지 속의 섬으로 짙은 초록빛 보리가 바람에 출렁일 때와 모내기를 앞두고 논마다 물이 가득 차 있으면 한층 그런 느낌이었다. 장마에 태풍으로 큰물이 밀려들면 마을 앞 들판은 거대한 호수로 변하고 골목길은 수로가 되어 황톳물을 마당으로 끌어들였다.

섬사람들이 그러하듯 소평마을 사람들은 새마을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자조, 자립, 협동정신이 강했다. 농사일은 물론이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병들어 고통 중에 있을 때나, 어렵고 힘들 때나, 언제나” 서로가 자신의 일인 양 팔을 걷어붙였다. 마을에 불이 나거나 도둑이 들어도 읍내 소방서나 파출소는 2km나 떨어져 있어서 있으나마나였다.

마을 주요 진입로는 마을 남쪽의 앞공굴을 통해 들어오는 길이었다. 마을 전체를 한 그루의 나무로 생각하면 이 길은 둥치였다. 둥치에서 가지가 뻗고 가지에는 집이 옹기종기 매달려 있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길은 동서로 나뉘어 동쪽은 우물터로 가고 서쪽은 곤실댁 마당을 지나 학봉댁 입구와 서동댁으로 가는 길이었다. 마을 입구에서 곤실댁 앞마당까지는 두 집 건너였다. 거기서 골목은 오른쪽으로 마을 안길로 이어지고 있었다.

안길 따라 명동댁과 새말댁(뒤에 저노댁이 사 들어 왔다) 대문을 지나면 우촌댁의 오른쪽 울타리를 만나 길은 다시 좌우로 갈라졌다. 왼쪽은 북부학교 가는 길이고 오른쪽으로는 교회를 지나 우물터로 가는 길이었다. 정월대보름 마을 줄다리기도 이 삼거리를 중심으로 양편이 늘어서서 당겼다. 이 세 갈래 길이 마을의 중심가였다.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2m 쯤 가면 우촌댁 집 뒤쪽 길 시작점으로서 마을 유일의 약간 어긋난 사거리였다. 북쪽으로 산포댁과 장산댁 사이로 난 길은 학교 가는 길, 동쪽으로 산포댁과 우촌댁 뒤쪽 샛길은 갱빈으로 소 먹이러 가는 길, 서쪽은 새말댁 뒷담과 장산댁 앞 울타리 사이의 샛길은 지호댁 가는 길이었다.

소 먹이러 가는 길로 가다보면 내동댁 집이 나오고 거기서 왼쪽으로 가면 큰거랑과 갱빈으로 가는 길, 오른쪽으로 가면 미뿌랑이었다. 미뿌랑의 봉분 세 개는 아이들의 놀이터로 변해 반질거리고 약장수가 오는 날이면 여기서 공연을 벌였다. 미뿌랑에서 곤동댁 집 앞으로 가면 우촌댁 집 앞길이 나오고, 똑바로 가면 교회가 나왔다. 교회 입구는 동촌댁과 마주하고 있었다.

삼거리에서 학교 길로 가다가 명포댁 집에서 양동산 쪽으로 보면 마을 뒷길이 하나 나 있었다. 그 길은 남오댁, 사촌댁 집 뒷길로 내동댁 담벼락을 타고 갱빈으로 가기 위해서 내려오는 길과 만나게 돼 있었다. 만난 후 큰거랑으로 가기 위해서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우물터 가는 길이 남쪽으로 나오고, 우물터에서 마을 앞길을 계속 따라가면 곤실댁 마당이었다.

남오댁과 사촌댁 집 뒤에는 용강댁 여섯 마지기 논이 동서로 한반도 눕혀놓은 것처럼 길게 놓여 있고 논 건너에는 자동댁(뒤에 우촌댁이 그리로 이사), 금오댁, 금산댁이 살고 있었다.

1990년 1월 어느 날 마을 유일의 사거리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왼편이 새말댁 담벼락, 담벼락 끝에 장산댁, 오른쪽이 산포댁, 산포댁 앞(안 보이는 부분)이 우촌댁으로, 약간 어긋난 사거리였다. 정재용 기자
1990년 1월 어느 날 마을 유일의 사거리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왼편이 새말댁 담벼락, 담벼락 끝에 장산댁, 오른쪽이 산포댁, 산포댁 앞(안 보이는 부분)이 우촌댁으로, 약간 어긋난 사거리였다. 정재용 기자

골목은 나뭇잎의 잎맥이나 거미줄처럼 한 덩어리로 연결 돼 있었다. 마을이 허파꽈리라면 골목은 모세혈관이었다. 농부가 밤이 이슥하도록 꼬아놓은 새끼줄 같기도 했다. 새끼를 꼬고 나면 왼발과 왼쪽 팔뚝을 이용하여 8자 모양으로 사리는 것을 ‘새끼를 상친다’라고 했다. 골목은 상치기 전의 새끼줄처럼 구불거렸다. 마을에는 수시로 옹기장수, 엿장수, 멸치젓장수, 과일장수 등이 물건을 팔러 왔는데 그들은 가끔 “이 작은 동네에서 길을 헤맸다”는 말을 했다.

골목은 소달구지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폭이 좁았다. 마주 오던 사람은 가까운 집의 마당으로 피신했다. 소달구지로 볏단을 나를 때면 옆으로 튀어 나온 볏단이 흙담을 넘어뜨릴까봐 마음을 졸였다. 좁고 긴 길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골목은 이상(李箱, 1910-1937)의 오감도(烏瞰圖) “13인의아해(兒孩)가도로로질주하오./(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또는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구절을 연상시켰다. 소평마을의 막다른 골목은 곤실댁에서 학봉댁 가는 길과 장산댁에서 지호댁 가는 길 정도였다. 그러나 골목은 농로로 연결돼 있어서 실제로는 모든 길이 뚫린 골목인 셈이었다.

집집마다 아이들이 네다섯 명씩 되다보니 골목은 학교 가고, 교회 가고, 일하러 가고, 소 먹이러 가고, 심부름 가고, 축구 하고, 고무줄놀이 하고, 점수놀이 하고, 물 길러 가고, 모여서서 이야기하는 어른들과 13인의 아이들로 넘쳐났다. 점수놀이 하는 아이들은 이 골목 저 골목을 질주 했다.

대문 있는 집은 거의 없었다. 있다 해도 닭이나 강아지가 밖으로 못 나가도록 막는 사립문 정도였다. 나뭇가지를 세로로 세워서 엮은 문이다. 보통 싸리나무, 족제비싸리(‘왜싸리’라고 불렀다), 대나무, 아까시나무 등을 사용했다. 문에는 잠금장치가 없거나 있어도 철사 고리가 전부였다. 틈으로 손을 넣거나 키가 낮아서 누구나 쉽게 벗길 수 있었다. 철제대문이나 함석 대문은 새마을운동과 더불어 생겨났다.

소평마을은 쉰 호가 처마를 맞대고 살다보니 서로가 남의 사정을 훤히 알고 있었다. 어떤 손님이 다녀가고, 무슨 일로 부부싸움을 하고, 닭을 얼마나 자주 잡아먹는지 금방 소문이 돌았다. 큰거랑 빨래터와 마을 남서쪽에 있는 우물터는 뉴스센터였다.

중국의 대표적인 전원시인 도연명(陶淵明)의 시 ‘사계(四季)’에 ‘산외산부진(山外山不盡), 노중로무궁(路中路無窮)’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산 너머 산은(첩첩 산은 넘고 넘어도) 끝이 없고, 길 가운데 길은 (가도 가도) 다 함이 없다니 그는 무릉도원(武陵桃源)도 산 넘어 그 어디엔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 같다. 소평마을은 산 대신 논부진(沓不盡)이고 골목길은 논길로 이어져 노무궁(路無窮)이었다. 논이 모체라면 마을은 태아, 논길과 골목길은 탯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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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2021-03-06 14:16:07
소평마을이야기 잘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