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삶의 터전’ ...‘술도가(都家)’와 ‘도리원 시장’ 사양길
‘전통’과 ‘삶의 터전’ ...‘술도가(都家)’와 ‘도리원 시장’ 사양길
  • 조광식 기자
  • 승인 2019.04.11 09:3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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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원교 입구에 있는 강희맹의 '도리원' 시비(詩碑)이다. 조광식 기자
도리원교 입구에 있는 강희맹의 '도리원' 시비(詩碑). 조광식 기자

 

아름다운 고유명사 도리원(挑李院)

‘도리원’은 의성군 봉양면 소재지를 일컫는 지명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고려시대 때부터 설치되었던 의성현 역원(驛院)의 하나였다. 「봉양면지」에서는 역원의 위치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봉양면 화전1리 (일명 원지, 원말)로 추측하고 있다. 역원은 고려·조선시대 의성지역의 교통로에 세워진 관영 교통 및 숙박시설이었다. 도리원 인근에는 비안면의 쌍계역과 금뢰면의 분토역이 있었다.

옛날 도리원 역원으로 추측되는 원지(원말)동네에 아이러니하게 원룸촌이 형성되어 있다. 조광식 기자
옛날 도리원 역원으로 추측되는 원지(원말)동네에 아이러니하게 원룸촌이 형성되어 있다. 조광식 기자

도리원교 입구에는 ‘도리원’에 관한 두 편의 시가 비석으로 세워져 있다.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한 강희맹의 시와 한국전쟁 당시 도리원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쓴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시비가 있다.

‘도리원’이라는 아름다운 고유명사를 가진 곳에 전통과 선인들의 삶의 터전이 사라져 가는 ‘술도가(都家)’와 전통시장인 ‘도리원시장(일명 도런장)’을 소개하고자 한다.

 

봉양막걸리 남광호 대표가 마지막 공정인 병마개를 닫고 있다. 조광식 기자
봉양막걸리 남광호 대표가 마지막 공정인 병마개를 닫고 있다.  조광식 기자

부부 선생님에서 양조장 대표로 가업 승계

2대째 55년의 전통 막걸리를 빚는 ‘봉양양조장’ 대표 남광호씨는 새벽 3시면 일어나 고두밥을 찌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봉양양조장은 선친께서 1964년경 전 소유주였던 마응백 씨로 부터 인수를 받아 막걸리를 만들었다”고 하면서 “1981년에 아버님이 연로하여 교사를 그만두고 제가 맡아서 지금까지 하고 있다”고 했다. 부부가 학교 선생님으로 재직하였으나 가업을 이어가고자 명예퇴직하고 양조장을 운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사라져가는 술도가에 대하여 “농주(農酒)인 막걸리가 잘 안 팔려서 의성지역에 양조장이 몇 개 안 남았다”면서 “1980년대만 해도 직원이 12명으로 술 만들기가 바빴으며, 인근에 문흥양조장, 장대양조장이 있었는데 1977년에 세 군데 합쳐서 ‘봉양탁주합동’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또 “막걸리 장사가 예전같이 않아 사양길로 접어들어 요즘은 양조장 운영이 힘이 든다”고 했다.

애주가들의 사랑을 받는 '봉양막걸리'이다. 조광식 기자
애주가들의 사랑을 받는 '봉양막걸리'. 조광식 기자

기자가 막걸리 만드는 과정을 물어보자 그는 “먼저 쌀하고 누룩을 섞어서 4~5일간 주모를 만든다. 초단이 만들어지면 2단 사입으로 고두밥을 쪄서 5일간의 숙성과정을 거치면 전술(전백이)이 만들어지게 된다. 거기에 물을 섞으면 맛있는 6도짜리 막걸리를가 된다”고 했다.

막걸리 만드는 첫공정인 주모를 발효하고 있다. 조광식 기자
막걸리 만드는 첫 공정인 주모를 발효하고 있다.  조광식 기자

술도가는 어린 시절 주전자를 들고 아버지 막걸리 심부름을 한두 번은 했을 50~60대들의 아련한 추억이 남아있다. 술지게미에 사카린을 타서 먹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오해를 받았던 기억들이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술도가와 얽힌 추억이다.

농민들의 시름과 피로를 덜어주며 농주로서 사랑을 받던 막걸리가 술 문화 변화와 더불어 사양길을 가고 있다. 전통의 가업을 잇고자 학교 교사자리도 마다하고 몸을 담은 ‘술도가’에 막걸리 애주가가 줄어들면서 부부선생님의 꿈도 사라질 위기에 있어 안타깝다.

 

도리원 시가지에 있는 전통시장 홍보 간판이다. 조광식 기자
도리원 시가지에 있는 전통시장 홍보 간판. 조광식 기자

‘대형마트’에 밀려... 전통시장 ‘도리원장날’ 사양길

1920년 9월 김춘식 면장이 시장을 구장터(도원2리)에서 현재 도리원시장(화전2리)으로 옮기면서 도리원의 한자 명칭이 도읍‘도’(都)에서 복숭아‘도’(桃), 마을‘리’(里)에서 오얏‘리’(李)자로 바꿔 쓰게 되었다.(都里院 → 桃李院)

도리원 전통시장은 ‘4일과 9일’날짜에 5일장이 열리는데 지난 9일 기자가 시장에 갔더니 손님은 없고 장사꾼들만 여기저기 서 있었다. 1960~1970년대 도리원장은 전통5일 시장으로서 꽤 북적였으며 특히 우시장이 번창하여 현금이 많이 통용되던 곳이다. 지금은 농협 하나로마트와 대형 수퍼마켓 등이 생겨나 시장에서 물건을 구매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 상권이 활성화하지 못하고 있다.

어물전에서 생선을 사고 있는 아주머니들이다. 조광식 기자
아주머니들이 어물전에서 생선을 사고 있다.  조광식 기자

또 몇 해 전부터 시장현대화 사업이라는 명목아래 옛날 가게들을 철거하고 새로운 건물을 신축하고 비도 새지 않는 지붕덮개를 했다. 마늘 장사를 하는 한 할머니는“가게를 분양 받은 사람은 몇 개씩 받아서 창고로 쓰고, 받지 못한 사람은 길거리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또 한 상인은 “시장 현대화 사업은 도시에서나 필요하지 시골에서는 몇몇 사람들에게 가게를 나누어 주어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안 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시장 현대화 사업에 불만을 토로했다.

시장에 점포를 구하지 못하고 도로변에서 마늘을 팔고 있다. 조광식 기자
시장에 점포를 구하지 못한 상인들은 도로변에서 마늘을 팔고 있다.   조광식 기자

옛날 도리원 장날은 촌에서 장보러 나온 아버지들이 막걸리 한 사발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회포를 풀고, 새끼줄에 고등어 한손 묶어 집으로 귀가 하던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풍경은 옛날 사진첩에서나 찾아볼 수 있어 기자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상인들에게 점포가 골고루 임대를 하지 않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2~3개 정도를 가지고 있다. 9일 날 장날인데도 문은 굳게 닫혀 있고, 점포를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조광식 기자
상인들에게 점포가 골고루 임대되지 않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2~3개 정도를 가지고 있다. 9일은 장날인데도 점포 문이 굳게 닫혀 있고, 점포를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조광식 기자

도리원시장은 일제강점기에는 주민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던 곳이며 선거 때는 유세장으로서 유일하게 후보자들의 정견발표를 경청하던 장소이기도 했다. 극장이 없던 시절에는 가설극장과 서커스단의 묘기, 동네 노래자랑 등을 볼 수 있었던 장소이기도 했다.

도리원시장은 물건을 사고팔고 하는 시장의 기능 외에 다용도로 사용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모이게 하던 곳이다. 5일마다 그리운 친구들을 만나 봉양막걸리 한잔 나누며 지난 얘기하던 전통시장이 자꾸 쇠퇴해져가는 것이 정말 안타까운 실정이다.

채소전에도 손님은 별로 보이지를 않는다. 조광식 기자
채소전에도 손님은 별로 보이지를 않는다.   조광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