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옛 지명을 찾아서] 다사읍 방천리
[사라진 옛 지명을 찾아서] 다사읍 방천리
  • 권오훈 기자
  • 승인 2022.02.05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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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쓰레기 처리장 건설로 사라진 500년 터전, 방천리
후세에 알리려 방천리 망향비와 망향정 세워
문화 류씨, 진주 강씨 등 23 개 성씨가 정을 나누며 살던 곳

대구시민이 배출하는 쓰레기는 모두 달성군 다사읍 방천리에 있는 쓰레기 처리장으로 모인다. 아침나절이면 쓰레기를 가득 실은 수거 트럭들이 모여든다. 와룡산이 뺑 둘러싸고 있는 이곳은 넓고 펑퍼짐한 지형이라 수용면적이 넓고, 산 너머가 가르뱅이마을에서 성서 아파트단지로 이어지는 주거지역이다. 시내 전역에서 이동 거리가 짧다. 대구시로서는 최적의 쓰레기 처리장인 셈이다. 그런 연유로 이곳이 선정되고 아늑하였을 이곳에서 500여년 조상 대대로 삶의 터전을 이루고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고향을 쫓겨나는 아픔을 안겼다.

방천리 와룡산 기슭에 있는 방천리 망향정과 망향비 전경. 권오훈기자
방천리 와룡산 기슭에 있는 방천리 망향정과 망향비 전경. 권오훈기자

 

방천리 산기슭에는 아담한 정자(망향정)와 큰 비석(방천리 망향비)이 있다. 정자에는 관련 사진을 확대하여 걸어 놓았는데 위아래로 세 개의 자연부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른쪽으로는 근년에 이장 조성했음을 한눈에 알 수 있게 깔끔한 단장의 문화 류씨 입향조 묘역과 재실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아래 금호강 쪽으로는 서재파크골프장 등 종합체육시설이 조성되어 시민들이 즐겨 찾고 있다.

망향정 정자 안에는 당시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권오훈 기자
망향정 정자 안에는 당시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권오훈 기자

 

‘방천리 망향비’ 비문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대구광역시 서쪽 십여 리의 와룡산 자락에 조용하고 아늑한 마을이 있었으니 이름하여 방천리라. 이곳의 옛 이름은 여호리(驪湖里) 또는 방내리(坊內里)라 하였으며 또 달리 이반 마을이라고도 했다. 상·하 두 마을과 원(院)이라는 취락으로 이루어진 고장이다. 와룡산을 감도는 금호강 맑은 물에는 고기들이 뛰어놀고 넓은 모래밭과 밤나무 숲은 가위 장관을 이루어 상춘객들이 찾기도 하던 곳이었다. 이곳에 먼저 터 잡았던 밀양 손씨들은 일찍 타처로 떠나갔고 성주 이씨들도 점차 떠나고 한두 집만 남았다. 다만 진주 강씨는 벌족으로 강성하였다. 임진왜란 때 충북 보은에서 이곳으로 입향 은거한 문화 류씨도 번성 세거하며 집성촌을 이루었다. 훗날 청주 한씨, 함안 조씨, 금령 김씨 등도 한두 집씩 있었다. 깊은 산골이라 생활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으나 순박한 마을 사람들은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미풍양속을 지켜 이웃 간의 정이 돈독했으며, 숭조와 효를 실천했었다.

망향정에 걸린 마을 청년들의 모습 사진. 권오훈 기자
망향정에 걸린 마을 청년들의 모습 사진. 권오훈 기자

 

1980년대에 뜻밖에도 대구시에서 위생매립장 조성을 위한 주민 설득이 시작됨에 따라 주민들은 고향 지킴에 심혈을 기울여 적극적으로 반대했으나 1989년에는 마침내 윗마을 전역에 매립장이 조성되고 말았다. 이로 인한 많은 선영도 이장해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 2005년에는 대구시에서 아랫마을까지 포함한 매립장 확장안을 발표하여 주민들이 심한 반대 저지가 있었으나, 고향 전 주민이 대구시의 공익사업에 협조함도 올바른 시민상이라는 시대적 흐름의 설명과 권유를 받아들였다. 다행히 대구시의 배려로 문화 류 씨 입향조 묘역은 보전되기는 했으나 여타 많은 선영 중 350여 기는 장지가 없어 극히 일부 선영만 이장하고 대다수는 부득이 소산(燒散)해야만 했다.

망향비 우측에 있는 문화 류씨 입향조 묘역은 조성한 지 오래지 않아 깔끔하다. 권오훈 기자
망향비 우측에 있는 문화 류씨 입향조 묘역은 조성한 지 오래지 않아 깔끔하다. 권오훈 기자

 

우리는 향내의 곳곳마다 조상님의 체취가 스며있고 형제들이 함께 뛰놀며 이웃이 정답게 살던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그러나 고향이란 떠날 수는 있으나 버릴 수는 없음이라 했다. 그간의 많은 사안은 모두 생략하고 극히 일부만이라도 후대에 전해야 할 책무 또한 있다. 여기 정들었던 고향 터에 망향비를 세워 고향을 기리는 계기로 삼으려고 이 비를 세움으로써 지난날 정겨웠던 고향을 회상해 보는 상징물이 되게 함이다. 2010년 10월

망향정에 걸린 옛 방천리 전경 사진. 권오훈 기자
망향정에 걸린 옛 방천리 전경 사진. 권오훈 기자

 

망향비 다른 양면에는 주민들 이름이 새겨져 있다. 문화 류씨(176), 진주 강씨(66) 포함 23개 성씨가 있다. 그중 14개 성씨는 한 명씩으로 도합 283명이다. 씨족 마을인데도 타성이 고르게 분포되어 있어 비문 내용대로 이웃 간의 정이 돈독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님비현상으로 지역사회의 필수 불가결한 사업 추진에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자주 보게 되는데 저항은 있었지만 대대로 내려오던 삶의 터전을 내어준 사람들의 마음에 고마움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