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실(齊室) 이야기] 옥천(沃川) 전씨(全氏) 재실 염수재(念修齊)
[재실(齊室) 이야기] 옥천(沃川) 전씨(全氏) 재실 염수재(念修齊)
  • 정양자 기자
  • 승인 2021.04.15 10:00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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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군 가창면 에 위치, 전유장(全有章)을 추모하는 재사(齊舍)
전극태의 '퇴헌일기(退軒日記)' 17세기 달성 사족의 생활상 기록

 

옥천(沃川) 전씨(全氏)의 시조(始祖) 전학준(全學俊)은 도시조(都始祖) 전섭(全聶)의 23세손으로 영동정(領同正)을 역임했다. 5세손 전유(全侑)가 고려에서 밀직부사(密直副使), 판도판서(版圖判書), 상호군(上護軍) 등을 지내고 관성군(管城君)에 봉해졌다. 그로 인해 후손들이 정선에서 분관하여 옥천(沃川)을 본관으로 해서 대를 계승하고 있다. 본관의 소재지는 충청북도 옥천(沃川)이다.

조선 시대 인물로는 고려조 대호군(大護軍)을 지낸 전필(全弼),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전유(全侑), 이부전서(吏部典書)를 지낸 전광운(全光韻), 진의부위(進義副尉)를 지낸 전의(全義),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전지(全智), 옥천 봉양서원과 영주의 방산사(方山祠)에 제향(祭享)되고 있는 전명룡(全命龍) 등과 다수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옥천(沃川) 전씨(全氏) 염수재(念修齊) 정양자
옥천(沃川) 전씨(全氏) 염수재(念修齊). 정양자 기자

염수재(念修齊)는 달성군 가창면 행정리 922번지에 있다. 정봉(正奉) 전유장(全有章)을 추모(追慕)하는 재사(齊舍)이다. 

후손들이 1986년 3월에 건립하였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1칸인 팔작(八作)지붕으로 된 재사(齊舍)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솟을대문인 숭덕문(崇德門)이 있다.

전유장(全有章)의 자(字)는 여환(汝煥) 호(號)는 정봉(正奉) 본관은 옥천(沃川)이다. 조선 광해군 4년(1612년) 출생하여 숙종 1년(1675년) 5월 27일 64세에 사망하였다. 

중시조(中始祖) 전유(全侑)의 11세손이다. 父는 선교랑(宣敎郎)을 지낸 전시헌(全時憲)이고, 祖父는 한성참군(漢城參軍)을 지낸 전해(全海)이며, 曾祖父는 進士를 한 전응삼(全應參)이다. 전유장은 조선 현종 1년(1660년) 9월 18일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666년 도백(道伯) 이태연(李泰淵)의 천거로 현종 11년(1670년) 閏 2월 13일 효행으로 참봉(參奉)에 奉해졌다. 그해 3월 18일 선공감참봉장사랑(繕工監參奉將仕郎)에서 종사랑행선공감(從仕郎行善工監)이 되었다.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행정리의 옥천(沃川) 전씨(全氏) 재실 염수재(念修齊) 숭덕문(崇德門). 정양자 기자

父 전시헌(全時憲)의 선교랑(宣敎郎) 수당공시헌(壽堂公時憲) 때 영주에서 대구 수성현 파잠리(壽城縣 巴岑里) 지금의 수성구 파동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이후 수남면(守南面) 현재 가창면 행정리(杏亭里)로 거처(居處)를 옮겼다. 관직을 마치고 향리로 돌아와 행정리 공더미산(空岩山 /公正山) 아래 청간(淸澗)에 집을 짓고 살았다. 

정사(精舍)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음풍영월(吟風詠月) 소요자적(逍遙自適)하였다. 전유장(全有章)은 옥천 전씨 행정 입향조(沃川 全氏 杏亭 入鄕祖)라 불리기도 한다. 

슬하에 5남 5녀를 두었다. 장남 극태(克泰)는 현령(縣令), 차남 극초(克初)는 통덕랑(通德郞), 3남 극념(克念)은 직장(直長), 4남 극화(克和)는 봉사(奉事), 5남 극민(克敏)은 참봉(參奉)을 지냈다.

『퇴헌일기(退軒日記)』는 장남 전극태가 혼례를 치른 후 아이들에게 어머니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하여 쓴 일기이다. 1658년(효종 9년) 12월 13일에 관례를 올리는 것부터 1663년(현종 4년) 9월 4일까지 기록하고 있다. 필사본으로 전해지던 것을 1999년 염수재(念修齊)에서 영인, 국역본으로 간행하였다. 17세기 중엽 달성 지역에 거주하던 사족(士族)들의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고, 사료적 가치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현재 염수재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