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말 한마디
따뜻한 말 한마디
  • 허봉조 기자
  • 승인 2020.03.02 12: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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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박하고 평범한 야채 노점상, 만날 때마다 따뜻한 말
웅크리고 있다가도 그녀의 말 한마디에 환한 웃음꽃
힘들고 어려울 때, 따뜻한 말 한마디가 큰 위로와 힘
허봉조 기자 취재3부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이 달포쯤 되었을까. 순박함의 대명사처럼 보이던 그녀의 입에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애교가 넘쳐흘렀다.

보기에는 수더분하고 평범한 야채 노점상이다. 야외에서 장사를 하려니 겉모습 또한 깔끔하기보다 추위에 대비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두터운 패딩 점퍼 위로 큼직한 주머니가 달린 앞치마를 두르고,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과 드문드문 얼굴에 자리한 깨알들이 생활상을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꾸밈없이 밝은 그녀의 표정에 떨쳐버릴 수 없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녀의 노점은 대단위 아파트가 밀집한 근린공원 입구로써 산책이나 운동을 위해 오가는 주부들이 이용하기에 딱 알맞은 곳이다. 시장이나 마트가 멀리 떨어져있어, 경쟁자도 없다. 애써 친절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진심을 다하는 것으로 충분하겠다 싶다. 그러나 그녀는 손님을 기분 좋게 하는 법을 터득한지 오래된 것 같았다.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가 좋아하는 노지시금치가 눈에 띄어 발길을 옮긴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시금치가 담긴 검정 비닐봉투에 농사지은 것이라며 작고 못생긴 무를 덤으로 주는 것이, 흐뭇했다. 며칠 후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에, 생각나는 것이 있어 또 들르게 되었다. 그녀는 단박 나를 알아보았다. ‘염색하지 않은 헤어스타일이 특이해 알아보기가 쉬울 것’이라며 내가 웃었다. 그녀는 “헤어스타일이 아니라, 푸근한 인상이 좋아서 그래요”라며 립 서비스(lip service)를 했다.

다음에는 ‘매일 기다리게 되더라’며 연인을 만난 듯 몸을 비틀었고, 네 번째 만났던 그날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나의 어깨를 감싸며 최고의 기분을 표현했다. “언니, 나 올해 대박 날 것 같아! 언니가 다녀간 날은 장사가 얼마나 잘 되는지 몰라요”라며, 내가 손님을 몰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정말? 잘 됐네”라며 장단을 맞추면서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립 서비스 잘하는 사람을 보면 부러울 때가 많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했던가. 몇 마디 말로 다른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것도 탁월한 재능일 것이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친구나 동료, 지인, 하물며 스쳐가는 나그네의 말이라도 듣는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멋진 일이 있을까. 다만,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형식에 그치는 경우라면 상대방의 기분이 언짢아질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할 일이다.

그 후로도 그녀는 볼 때마다 “찾아줘서, 고마워요!”를 노래하니, 당장 필요한 것이 없더라도 가지런히 펼쳐놓은 채소들을 슬며시 돌아보게 된다. 서로 상대방을 헐뜯고 손가락질하며,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내로남불’의 지도층 인사들에 비하면 얼마나 당당한 모습인가. 또한 선거철에만 허리를 굽혔다 사라지는 철새 같은 정치인들에 비하면 얼마나 아름다운가.

언제 들어도 좋은 그녀의 따뜻한 말은 보다 즐겁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지혜를 다시 한 번 일깨워준 선물이 아닌가 싶다.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도 고울 수밖에 없으니, 좋은 말을 건네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줄이는 비결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잔뜩 웅크리고 있다가도 콧소리가 섞인 그녀의 말 한마디에 환한 웃음꽃이 필 수 있으니, 발걸음이 절로 가벼워질 수밖에….

그렇게 작은 일이라도 정이 담뿍 밴 관심과 칭찬의 말을 주고받는 문화가 우리 사회에 널리 번져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사회가 힘들고 어려운 때, 불신과 비난의 가시가 박힌 차가운 말보다는 신뢰와 배려가 어우러진 따뜻한 말 한마디야말로 지쳐가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요즘은 며칠이라도 산책을 나가지 않으면 그녀가 은근히 궁금해진다. 시장에서 살 수 있는 채소도 이왕이면 애교가 철철 넘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지난 안부와 함께 사고 싶어지는 것이다. 앞치마 주머니에 넣어두었다가 가만히 건네주던 달착지근한 군고구마와 쪼글쪼글 온기가 전해지던 꼬마 밀감도 그녀를 생각나게 한다.

그래, 맛과 향이 상큼한 커피를 내려 그녀가 있는 근린공원으로 가자. 그리고 나도 그녀에게 덕담을 해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