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이바(おだいば)항 & 제물포항이 주는 교훈!
오다이바(おだいば)항 & 제물포항이 주는 교훈!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3.05.1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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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국정책을 펼치고 있는 대원군 앞에서는 이러한 전후 사정이 통할 리가 없었다
이는 죽여주십시오! 하고 사정하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오다이바(おだいば)항 전경, 이원선 기자
오다이바(おだいば)항 전경, 이원선 기자

오다이바(おだいば)는 인공으로 조성된 섬으로 도쿄의 주요 관광지 중 한 곳이다. 임해 부도심인 동시에 항구가 있는 곳이다. 이곳 항구가 주목받는 것은 이 항구를 통해 일본은 최초로 개항, 서양의 신문물을 받아들여 강대국으로 가는 토대로 삼았기 때문이다. 일본이 처음부터 개항을 원했던 것은 아니다. 강력한 반대는 물론 대포로 무장을 꾀하는 등 반발했다.

다이바(だいば, 台場)는 방어를 목적으로 만든 포대를 말한다, 19세기 말 일본을 개항시키기 위해 미국은 도쿄만에 파견한 쿠루후네 사건 때의 함대를 파견한다. 함장 페리 제독이 첫 번째로 찾아오자 기겁한 일본이 1년을 약속으로 급하게 포대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당시 일본은 약속한 1년 동안 30여 문 이상의 대포를 만들면 승산이 있다고 여겨 대포제작에 박차를 가한다. 하지만 무기를 만드는 데는 여러 가지의 제약이 따른다. 정치적 문제, 자금 조달의 문제 등등이 이슈로 떠오른다. 결국에 일본은 1년 동안 20여 문의 대포밖에 만들지 못하고는 미국의 요구에 따라 개항이다.

페리 제독과 싸움 대신 개항을 하게 되자 존재 가치가 사라진 포대 주변은 매립되거나 버려진다. 이에 도쿄시는 1880년대부터 스미다강 하구의 퇴적물로 준설공사를 하게 된다.

반면 당시 우리나라의 실정은 어떠했을까? 쉽게 말해 정중와(井中蛙)라고나 할까? 불행히도 나이 어린 고종황제를 섭정으로 흥선 대원군이 쇄국정책(鎖國政策: 다른 나라와 통상, 교역을 금지하고 외교 관계를 제한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던 때였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미국은 일본을 강제 개항시킨 흑선 사건을 통해 포함외교(gunship diplomacy, 砲艦外交)를 통하면 조선의 제물포(인천)항도 문제가 없으리라 여겼다. 이렇게 판단한 근거로는 조선은 일본에 대해 전투력이 한참이나 뒤진다는 사실도 한 몫 거든다. 하지만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는 대원군 앞에서는 이러한 전후 사정이 통하 리가 없었다.

“국적선 조난 문제라면 구호해서 해당 국가로 보낼 테니 걱정할 것도 없고, 교역 문제는 만들어낼 물건도 없고 팔 물건도 그렇게 넉넉지도 않고 그나마 우리 쓸 것도 많지 않으니 장사 안 한다” 라고 답한 대원군은 즉각 군사를 파견했다.

이로 인해 미국과 처음이자 마지막 전쟁으로 제너널 셔먼호 사건에 항의하는 전쟁을 치르게 된다. 광성보 등지를 점령한 미국 함대와의 전쟁은 그야말로 어른과 아이와 싸움처럼, 계란으로 바위 치기처럼 애당초 가당치가 않았다. 전쟁에 임하는 조선군은 변변찮은 총도 없이 객기만 앞세운 ‘무대포’같은 행동에 불과했다.

일본은 16세기에 규우슈우 지방을 통해 포루투갈 상인으로부터 총 두 자루를 사들인다. 길이 가 석 자쯤의 철통(鐵筒)을 쏘니 번개 같은 불이 일어나고 천둥 같은 소리가 나는데 산을 무너뜨릴 듯하고 철벽(鐵壁)을 뚫는다고 하여 철포(鐵炮, 뎃뽀오, 훗날 언어 변화를 거쳐 ‘대포’가 된다)라 했다. 이후 일본은 총을 개조하고 연구하여 새로운 총을 만들어내니 나는 새도 잡을 수 있다는 조총(鳥銃)이 된다. 이때 조총 앞에 무식하게 맨주먹이나 칼을 들고 덤비는 사람을 두고 조선에서는 ‘무대포’라 불렀다.

1871년 6월1일에서 7월 3일 동안 있었던 싸움은 인간 살육장을 연상할 만큼 결과는 참담했다. 일본의 조총보다 더 신식 무기를 지닌 미국군 앞에 조선군은 부질없이 죽어갈 뿐이다.

오다이바(おだいば) 공원에 있는 자유여신상. 이원선 기자
오다이바(おだいば) 공원에 있는 자유여신상. 이원선 기자

당시 전쟁의 상황을 살펴보면 조선군은 어재현, 정기원, 이현학, 김현경 등 육군 1천여 명 정도가 전쟁에 참여했다. 이에 맞서는 미국군은 존 로저스, 윈필드 스콧 슐레이 등 해군 1천 230여 명이다. 군사의 숫자만 보아도 조선군이 열세다. 이런 점을 헤아려 본다면 전쟁의 승패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로 말미암아 조선군의 피해는 344여 명 이상 전사가 발생한다. 반면 미국군은 전사 3명에 13~15명 정도의 부상자 발생이 전부다. 덧붙여 조선군 20여 명이 포로로 잡힌다. 이는 당연한 결과였다. 미국군은 애당초 지형적으로도 유리한 광성보 등지를 진지로 삼았다. 반면 조선군은 재래식 무기로 녹슨 조총 몇 자루와 활, 칼, 창 등으로 무장한 채 백사장을 죽자 살자 내달릴 뿐이다. 이는 죽여주십시오! 하고 사정하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전쟁을 치르고 난 미국이 대원군에게 이만하면 본 때를 보았으니 제물포항을 개항할 것을 요구했으나 대원군은 완강하게 거부다. 우리에게 병사는 얼마든지 있다며 다시 군사를 파견하겠다는 말에 미국은 조선과의 교역을 통해 도움을 주면 주려왔지 사람을 죽이고자 오지는 않았다며 퇴각이다.

각기 다른 선택을 한 두 나라의 앞날도 천양지차로 달랐다. 개항을 결정한 일본은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함은 물론 세계를 지배하고자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다. 반면 제물포항을 굳게 닫은 조선은 36년간이나 일본의 식민치하에 들어 온갖 수모와 치욕 끝에 광복을 맞는다.

삼면이 바다임에도 우리나라는 사방이 적으로 둘러 쌓여있다. 동쪽은 일본으로 우방이라 할 수 없다. 툭하면 죽창가를 부르고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입장이면 토착 왜구 취급이다. 나이의 고하는 불문이다. 서쪽은 거대한 땅덩어리에 세계 최대인구를 자랑하는 중국이다. 명나라까지는 그래도 형제국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병자호란을 맞아 인조가 삼전도 치욕적인 항복 후 신하 국으로 전략, 속국 취급이다. 남쪽은 태평양으로 가는 길이다. 한데 서쪽으로 대만이 자리 잡고 있다. 한때는 국교가 수립되는 등 우방이었다. 하지만 어느 때 아시안 게임 중 인공기 계양 사건 이후 어정쩡한 사이로 변해 버렸다. 게다가 북쪽은 더 험하다. 같은 동포지만 한 하늘아래서는 같이 살 수가 없단다. 남한을 두고 기어이 불바다로 만들고 말겠다고 호언장담이다. 이를 위해 원자폭탄을 말들어 호시탐탐 위협하는 지경이다. 그 너머로는 발톱과 이빨을 감춘 러시아가 북극곰처럼 웅크리고 있다.

그런 가운데 진정한 우방국인 미국은 태평양을 건너서 멀리 있다. 현대전은 속전속결로 결판이 난단다. 단기전으로 봤을 때 이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어떤 선택을 해야만 누란지위(累卵之危) 같은 이 위기를 현명하게 벗어나고 국익을 취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의 선택이 가당찮다. 주관식은 필요치가 않단다. 객관적이고 명확한 답이라야 한단다. 한시라도 선택지를 등한시할 수가 없단다. 역사는 미래를 가늠하는 잣대라 했다. 또다시 오다이바 항과 제물포항 같은 선택이라면 진정 곤란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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