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무덤을 가다
일본 여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무덤을 가다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3.05.0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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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둘레를 돌난간으로 돌려친 모양이 흡사 고구려 시대의 적석총인 장군총을 연상케 하고 있다
한데 조각 된 20대의 모습이 귀를 막고, 눈을 막고, 입을 막고 있는 모습이다
1636년(인조 14년) 동조궁이 막 완성된 시점에 조선 4대 조선 통신사가 방문
일본 닛코에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의 무덤. 이원선 기자
일본 닛코에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의 무덤. 이원선 기자

일본 닛코(日光)에 있는 동조궁(東照宮 도쇼구)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에 이어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의 무덤이 있는 곳이자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는 곳이다. 기록에 의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죽기 전 혼다 미사즈미, 난코보 텐카이, 곤치이 스덴을 불러 유언하기를 자신이 죽으면 쿠노산(久能山)에서 장사를 치르고 장례는 조죠지(増上寺)에서, 위패는 다이쥬지(大樹寺)에 봉안한 후 1주기에 이르러 닛코에 작은 사당을 지어 그곳으로 이장해 신으로 모시면 간토의 수호신이 되겠다고 했다. 이후 1616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상을 떠나자 닛코(日光)에 동조궁을 건조하고 이듬해 그 유골을 안장하였다. 이후 일본 각지에서 그의 위패를 모신 동조궁이 속속 세워져 에도 시대에는 그 수가 500여 개소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메이지 초기에 이르러 상당수의 동조궁이 철폐되거나 통합되는 수난을 겪는다. 이때 궁을 관리하던 무녀들도 함께 추방되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일부가 복구된 결과 현재 남아있는 동조궁은 130여 개소에 이르고 있다. 무덤은 동조궁 뒤편 해발 약 650m여 지점에서 동남쪽을 향해있다. 아래쪽을 육각형 형태의 5단의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육각형 모양의 4단에 걸쳐 대리석으로 쌓은 뒤 다시 문양을 넣은 1단을 대리석으로 쌓은 위에 철재 조형물을 올렸다. 또 앞쪽으로는 물고기를 입에 문 새와 해태상을 닮은 동물, 향로 등을 배치했다. 그리고는 그 둘레를 돌난간으로 돌려친 모양이 흡사 고구려 시대의 적석총인 장군총을 연상케 하고 있다,

동조궁과 무덤, 신사, 사찰주위로는 수백 년은 됨직한 삼나무 숲이 울창한 가운데 무덤으로 가는 길은 약 200여 개의 돌계단으로 이루어졌다. 돌계단 입구에는 두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나무로 된 문이 있으며 사람마다 문루를 올려다보며 카메라나 휴대폰 등으로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다. 이유인즉 문루 앞뒤로 새겨진 새와 고양이를 촬영하기 위함이다. 이는 새와 고양이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매료된 때문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무덤 입구, 문루 위에 조각 된 새. 이원선 기자
도쿠가와 이에야스 무덤 입구, 문루 위에 조각 된 새. 이원선 기자

같은 새를 두고 천하를 80~90%를 접수하고도 불의의 일격을 당해 미완에 그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급진적이고 과감한 성격답게 울지 않은 새는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이에 천하통일의 대업을 성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잔꾀가 많고 교활한 성격답게 새가 울지 않으면 자신이 울게끔 하겠다고 말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천하가 혼란한 틈을 타서 재차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꿍꿍이가 깊고 치밀한 성격답게 울지 않은 새는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말로써 유명한 일화 때문이다.

잠자는 고양에 관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고양이가 깊이 잠들만큼 이곳이 길지라는 것이다. 고양이는 고양이과의 맹수답게 아무리 깊이 잠들더라도 사주 경계와 사냥을 위해 실눈을 떠서 잔다는데 세상모르게 잠들었다는 것은 자신이 잠든 묘터가 더없는 명당이라는 것이다. 이 외에도 동조궁 앞에는 원숭이의 일생을 조각한 작품이 있다. 이 조각에서 주목할 점은 20대의 원숭이를 표현한 모습이다. 원숭이란 동물은 원래부터 경박하여 잠시도 가만있지 못해 부산스러운 동물이다. 이 조각에서 특이한 점은 조각된 20대의 모습이 귀를 막고, 눈을 막고, 입을 막고 있다는 것이다. 20대에는 자못 실수가 잦은 시기라 자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데 그 모습이 흡사 우리나라의 고단한 시집살이를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봉사 3년이면 힘들고 어려운 시집살이가 대충 끝난다는 표현은 우리나라의 토속문화가 아니라는 뜻이다. 도입된 시기와는 상관없이 애당초 일본의 고유문화라는 것이다.

그럼 몸은 퉁실하고 성격이 능글맞다 하여 간토의 너구리(関東の狸)란 별명을 가진 도쿠가와 이에야스 어떤 인물일까? 그는 임진왜란이 교착상태에 빠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쟁참여 독려에 매번 이런저런 핑계를 들어서 빠져나갔다. 에도 지역에 흉년이 들었다. 반란의 조짐이 보인다는 등으로 미꾸라지처럼 교묘하게 피해 나갔다. 그런 한편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 장수들을 한명 한명 자신의 편으로 집요하게 끌어들이는 일에 몰두한다. 그 결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후 그의 아들과 이시다 미츠나리가를 중심으로 중앙집권화를 노리는 서군과의 전투에서 단번에 승리한다, 양군 통틀어 17만 대군이 세키가하라(関ヶ原 : 지금의 기후현 후와군 세키가하라초)에서 맞붙었지만 단 3시간 만에 전쟁이 끝났다. 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임진왜란에 불참하는 동안 적군의 주요 요직 곳곳에 심어 놓은 첩자인 듯 아군 때문이다. 그런 장수 중에는 우리나라 사람이면 그 이름만으로도 누구나 치를 떠는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도 포함하고 있다. 반면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반대편에 섰다가 죽음을 맞는다.

무덤 앞에 있는 동조궁. 이원선 기자
무덤 앞에 있는 동조궁. 이원선 기자

전쟁이 시작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의사 결정을 확실히 하라는 뜻에서 적군보다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포섭한 아군을 향해서 대표를 쏘아붙인다. 이에 곧장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더 이상의 싸움은 의미가 없었다. 이후 그는 천하를 안정시킨다. 그런 한편으로 뜻에 반하는 자는 철저하게 숙청하는 것으로 메이지(明治) 천황에게 권력을 넘겨주기까지 약 265년간 일본을 지배하는 기초를 닦은 뒤 2년여 만에 권좌에서 물러나는 결단성을 보인다. 이러한 그의 행적을 찬찬히 살펴볼 때 비록 적국의 왕이지만 반면교사로 삼아 배울 점이 많아 보인다.

게다가 이곳 동조궁은 당시 조선과도 인연이 닿은 곳이다. 1636년(인조 14년) 동조궁이 막 완성된 시점에 조선 4대 조선 통신사가 에도를 방문했을 때다. 본래 통신사들은 에도에 도착하면 쇼군을 만나 국서를 전달하고 답신을 받아 조선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그 임무가 끝난다, 한데 막부는 굳이 닛코에 있는 동조궁에 방문해달라고 강권하여 방문하였다는 기록이 남은 때문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언으로는 사람의 일생은 참으로 버거운 짐을 지고 가는 먼 길과 같다. 그러니 절대 서두르지 말아라. 인내는 무사 장구의 근본이고, 분노는 순간의 적이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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