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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 중앙에서 남쪽으로 갈라졌고, 다시 그 중간에서 서쪽으로 갈라져 마치 바위굴이 ‘ 口’ 자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 굴을 세칭 ‘극락굴’ 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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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진 바위틈으로 겨우 한사람이 게 걸음으로 다닐 수 있는데 안경도 벗고 자동차 열쇠도 내려놓고 세상의 욕심을 모두 내려 놓아야만 비로소 돌아 나올 수 있다고 전해지면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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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장군이 수도했던 중악석굴은 남북에서 호석(虎石)과 용석(龍石)이 호위하고 있는 형국이다. 남쪽의 금당 터 뒤에 있는 큰 바위가 호석(虎石)이고, 석굴의 북쪽을 연하여 길게 이어진 사인암 바위가 용석(龍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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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악석굴에서 나와 상인암방향으로 가다가 300여m정도 내려가면 김유신 장군이 석굴에서 수도하면서 마셨다는 장군수(將軍水) 약수터가 있다. 10m가 넘는 바위절벽 아래에서 솟아나는 석간수(石間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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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三國史記) 김유신전(金庾信傳)에는 ‘‘김유신은 나이 15세에 화랑이 되어 그를 따르는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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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 28년(611년) 나이 17세에 고구려, 백제, 말갈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외적을 평정할 뜻을 품고, 혼자 중악석굴에 들어가 재계(齋戒)하고 하늘에 고하여 삼국을 평정할 것을 맹서(盟誓)했다.’ 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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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수 약수터에서 되돌아 올라와서 우측 산길을 100m정도 걸어가면 좁은 바위틈을 지나 건들바위와 만년송(萬年松)을 만날 수 있다. 널찍한 너럭바위 위에는 두 토막 난 큰 바위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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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는 길이가 7m, 긴 폭은 2m, 짧은 폭은 1m 정도로 건들 바위, 일명 동석(動石)이라고 한다. 혼자 흔들자 꿈쩍도 않더니 서너 명이 달라붙자 흔들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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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암(悅菴) 하시찬(夏時贊ㆍ1750-1828)은 인종대왕태실(仁宗大王胎室)을 살펴본 뒤에 이곳에 와서 ‘건들바위(動石)’ 시를 지었다.
石性元來靜是常 / 돌의 성질은 원래 고요한 것이 정상이나,
胡然能動在山崗 / 갑작스럽게 산등성에서 움직이네.
似知體用相須妙 / 흡사 체용을 알아 서로 오묘함을 필요로 하니,
百劫藍風不敢傷 / 백겁(百劫)토록 남풍(藍風)이 상하게 하지 못하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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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ㆍ1625∼1707)은 산중일기에서 ‘ 건들 바위는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는 석대(石臺)’ 라고 하였다. 건들 바위에 올라서면 북쪽으로 천왕봉을 비롯한 팔공산 정상부가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산 아래로 운부암이 지척인 듯 바라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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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들바위 옆에는 아름답다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바위들. 잘록한 몸매에 풍만한 몸매를 가진 여인네 몸처럼 둥글둥글하고 완만한 곡선을 가지고 있는 바위틈을 비집고 뿌리를 뻗으며 자란 소나무가 있으니 이 소나무가 만년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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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들 바위 옆에는 만년송이 두개의 바위 틈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하늘을 향해 우뚝하게 서있다. 만년송은 바위 위에서 세 줄기로 갈라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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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송 높이는7-8m 남짓하고, 가지 둘레는 80㎝에서 140㎝ 정도이나 수령이 얼마인지는 알지 못한다. 사방이 바위로 뒤덮인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온갖 시련을 이겨낸 소나무의 놀라운 생명력은 만년송이란 이름과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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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한줌 없는 바위틈에서 혹독한 주변 환경속에서도 인고의 세월을 버텨온 나무를 보고 있노라면 모진 생명력이 보이는 듯하다. 그런 혹독하고 모진 자연환경을 헤치며 지금까지 견뎌왔기 더없이 놀랍고 숭고해 보이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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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송이 있는 곳에서 몇 발자국만 옮기면 산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가 된다. 사방으로 확 틔여 있고 눈앞에 펼쳐진 자연경관이 빼어나서 호연지기가 저절로 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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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인암 북쪽 바위벽에는 제명(題名)을 남긴 영천군수(永川郡守) 조재득(趙載得), 원주판관(原州判官) 재한(載翰), 고산현감(高山縣監) 재리(載履)는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조현명(趙顯命)의 세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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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조재득(趙載得)의 아들 노진(潞鎭)과 수진(修鎭)이 찾아와서 아버지와 숙부 제명(題名) 옆에 자신들의 이름을 새겼다. 조재득(趙載得)이 제명을 새긴 바위 동쪽에는 널찍한 공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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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한(丁時翰)은 산중일기에 ‘이 자리를 고봉암(高峰菴) 터라 하고 전후좌우의 암석이 기괴하니 실로 도인(道人)의 수행처라 할 만하였다’ 고 했다. 전해오기로는 이곳을 화랑의 수련장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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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악석굴과 연해 동쪽을 향해있는 용석(龍石)의 머리 부분에 ‘삼인암(三印岩)’ 3글자가 깊이 새겨져 있다. 삼인암은 큰 바위가 세 토막으로 잘려있는데 간격은1-2m 정도로 뛰어 넘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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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인암에는 ‘‘자식이 없던 부인이 여기에서 정성을 들여 아들 삼형제를 낳았다’ 는 기자석(祈子石)의 전설이 있다. 또 어느 집안 아들 삼형제 혹은 친구 세 사람이 뜻하는 바가 있어서 이곳에 와서 정성을 들이고 힘써 정진하여 모두 뜻하는 바를 이루었다’ 는 전설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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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인암(三印岩)은 불교의 삼법인(三法印)을 상징한다고 불가에서 말한다. 삼법인(三法印)은 불교의 3가지 진리라는 뜻으로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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