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에서 가장 오래된 소나무 중암암(中巖庵) 만년송을 찾아서②
팔공산에서 가장 오래된 소나무 중암암(中巖庵) 만년송을 찾아서②
  • 장희자 기자
  • 승인 2020.06.07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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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송과 삼인암
사방이 바위로 뒤덮인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온갖 시련을 이겨낸 소나무의 놀라운 생명력은 만년송이란 이름과 잘 어울린다. 장희자 기자

석굴 중앙에서 남쪽으로 갈라졌고, 다시 그 중간에서 서쪽으로 갈라져 마치 바위굴이 자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 굴을 세칭 ‘극락굴이라 한다.

석문을 지나 와서 뒤돌아 보니, 바위가 묘하게 맞물리고 조화를 이루어 돌구멍을 만든 모습이 신비하게 보인다. 장희자 기자

갈라진 바위틈으로 겨우 한사람이 게 걸음으로 다닐 수 있는데 안경도 벗고 자동차 열쇠도 내려놓고 세상의 욕심을 모두 내려 놓아야만 비로소 돌아 나올 수 있다고 전해지면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요사채옆 돌구멍안에 설치되어 있는 중암암 해우소는 문화재로 보호하고 있다. 장희자 기자

김유신 장군이 수도했던 중악석굴은 남북에서 호석(虎石)과 용석(龍石)이 호위하고 있는 형국이다. 남쪽의 금당 터 뒤에 있는 큰 바위가 호석(虎石)이고, 석굴의 북쪽을 연하여 길게 이어진 사인암 바위가 용석(龍石)이다.

중암암 담벽아래 요사채 지붕에 식물들이 자라고 있고, 담장 기와 잘 어울려 고풍스러운 산사 달력그림이 된다. 장희자 기자

중악석굴에서 나와 상인암방향으로 가다가 300여m정도 내려가면 김유신 장군이 석굴에서 수도하면서 마셨다는 장군수(將軍水) 약수터가 있다. 10m가 넘는 바위절벽 아래에서 솟아나는 석간수(石間水)이다.

용왕각옆에 있는 석굴에서 나오는 석간수는 맑고 차서 팔공산의 정기가 듬뿍 담겨 있다. 장희자 기자

삼국사기(三國史記) 김유신전(金庾信傳)에는 ‘김유신은 나이 15세에 화랑이 되어 그를 따르는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었다.

돌계단을 오르면 윤이나고 눈사람처럼 생긴 거대한 바위인 호석(虎石)과 소나무가 잘 어울려 멋긴 풍경화를 연출하고 있다. 장희자 기자

진평왕 28년(611년) 나이 17세에 고구려, 백제, 말갈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외적을 평정할 뜻을 품고, 혼자 중악석굴에 들어가 재계(齋戒)하고 하늘에 고하여 삼국을 평정할 것을 맹서(盟誓)했다.’ 는 기록이 있다.

바위앞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32호(2001.11.01.)로 지정된 중암암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장희자 기자

 장군수 약수터에서 되돌아 올라와서 우측 산길을 100m정도 걸어가면 좁은 바위틈을 지나 건들바위와 만년송(萬年松)을 만날 수 있다. 널찍한 너럭바위 위에는 두 토막 난 큰 바위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석탑이 있는 좌측에도 눈사람 처럼 생긴 바위가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장희자 기자

크기는 길이가 7m, 긴 폭은 2m, 짧은 폭은 1m 정도로 건들 바위, 일명 동석(動石)이라고 한다. 혼자 흔들자 꿈쩍도 않더니 서너 명이 달라붙자 흔들거린다

금당터 위쪽의 암봉지대. 바위 사이로 난 길로 들어가다 오른쪽에 갈라진 좁은 바위틈이 보이는데 그곳이 극락굴로 드는 입구다. 장희자 기자

열암(悅菴) 하시찬(夏時贊ㆍ1750-1828)은 인종대왕태실(仁宗大王胎室)을 살펴본 뒤에 이곳에 와서 건들바위(動石)시를 지었다.

石性元來靜是常 / 돌의 성질은 원래 고요한 것이 정상이나,

胡然能動在山崗 / 갑작스럽게 산등성에서 움직이네.

似知體用相須妙 / 흡사 체용을 알아 서로 오묘함을 필요로 하니,

百劫藍風不敢傷 / 백겁(百劫)토록 남풍(藍風)이 상하게 하지 못하였네.

극락굴 출입구는 2개인데, 금당터에서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보이는 이곳이 정식 극락굴입구이다. 장희자 기자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ㆍ1625∼1707)은 산중일기에서 건들 바위는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는 석대(石臺)라고 하였다. 건들 바위에 올라서면 북쪽으로 천왕봉을 비롯한 팔공산 정상부가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산 아래로 운부암이 지척인 듯 바라보인다 

극락굴을 지나서 만년송으로 가려면 이곳 바위틈을 지나야 한다. 장희자 기자

건들바위 옆에는 아름답다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바위들. 잘록한 몸매에 풍만한 몸매를 가진 여인네 몸처럼 둥글둥글하고 완만한 곡선을 가지고 있는 바위틈을 비집고 뿌리를 뻗으며 자란 소나무가 있으니 이 소나무가 만년송이다.

흙이 없는 두개의 바위틈새에 길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만년송. 장희자 기자

건들 바위 옆에는 만년송이 두개의 바위 틈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하늘을 향해 우뚝하게 서있다. 만년송은 바위 위에서 세 줄기로 갈라져 있다.

만년송 너머로 너럭바위 위에 건들바위가 놓여있다.

만년송 높이는7-8m 남짓하고, 가지 둘레는 80에서 140정도이나 수령이 얼마인지는 알지 못한다. 사방이 바위로 뒤덮인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온갖 시련을 이겨낸 소나무의 놀라운 생명력은 만년송이란 이름과 잘 어울린다.

만년송 옆에서 V자를 그리며 응원하면서 동거동락하고 있는 락락장송. 장희자 기자

흙한줌 없는 바위틈에서 혹독한 주변 환경속에서도 인고의 세월을 버텨온 나무를 보고 있노라면 모진 생명력이 보이는 듯하다. 그런 혹독하고 모진 자연환경을 헤치며 지금까지 견뎌왔기 더없이 놀랍고 숭고해 보이기까지 한다.

등반객들이 만년송에 올라서 기념촬영을 하여 나무껍질이 붉은색으로 변해 있다. 장희자 기자

 만년송이 있는 곳에서 몇 발자국만 옮기면 산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가 된다. 사방으로 확 틔여 있고 눈앞에 펼쳐진 자연경관이 빼어나서 호연지기가 저절로 키워진다.

만년송에서 바라보이는 하양 환성산 줄기가 그림처럼 다가온다. 장희자 기자

삼인암 북쪽 바위벽에는 제명(題名)을 남긴 영천군수(永川郡守) 조재득(趙載得), 원주판관(原州判官) 재한(載翰), 고산현감(高山縣監) 재리(載履)는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조현명(趙顯命)의 세 아들이다 

삼인암 북쪽 바위벽에 세겨진 영천군수(永川郡守) 조재득(趙載得)과 아들 글씨가 세겨져 있다. 장희자 기자

훗날 조재득(趙載得)의 아들 노진(潞鎭)과 수진(修鎭)이 찾아와서 아버지와 숙부 제명(題名) 옆에 자신들의 이름을 새겼다. 조재득(趙載得)이 제명을 새긴 바위 동쪽에는 널찍한 공터가 있다.

삼인암(三印岩)을 용석(龍石)이라고도 부르는데 머리 부분에 3글자가 깊이 새겨져 있다. 장희자 기자

정시한(丁時翰)은 산중일기에 이 자리를 고봉암(高峰菴) 터라 하고 전후좌우의 암석이 기괴하니 실로 도인(道人)의 수행처라 할 만하였다고 했다. 전해오기로는 이곳을 화랑의 수련장이라고도 한다.

삼인암은 큰 바위가 세 토막으로 잘려있는데 간격은 1~2m 정도로 뛰어 넘어갈 수 있다. 장희자 기자

중악석굴과 연해 동쪽을 향해있는 용석(龍石)의 머리 부분에 삼인암(三印岩)’  3글자가 깊이 새겨져 있다. 삼인암은 큰 바위가 세 토막으로 잘려있는데 간격은1-2m 정도로 뛰어 넘어갈 수 있다.

삼인암옆에 사람모양의 바위도 있는데 샘이 파져 있다. 장희자 기자

삼인암에는 ‘자식이 없던 부인이 여기에서 정성을 들여 아들 삼형제를 낳았다는 기자석(祈子石)의 전설이 있다. 또 느 집안 아들 삼형제 혹은 친구 세 사람이 뜻하는 바가 있어서 이곳에 와서 정성을 들이고 힘써 정진하여 모두 뜻하는 바를 이루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정시한이 산중일기에서 고봉암(高峰菴) 터라 하던 이곳을, 화랑의 수련장이라고도 한다. 장희자 기자

삼인암(三印岩)은 불교의 삼법인(三法印)을 상징한다고 불가에서 말한다. 삼법인(三法印)은 불교의 3가지 진리라는 뜻으로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말한다.

출발지인 감나무집에 도착하니 벌써 노을이 지고 있다. 장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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