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정(太古亭), 사육신 박팽년의 숨결이 들리는 달성 하빈
태고정(太古亭), 사육신 박팽년의 숨결이 들리는 달성 하빈
  • 장희자 기자
  • 승인 2020.07.0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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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팽년의 유복손 박일산이 1479년 세운 보물 제554호 정자.
조선 중기 건실한 초익공계(初翼工系) 구조 역사적 가치가 높은 귀중한 정자.
선조의 불사이군(不事二君) 정신은 본 받아야 할 현대인의 좋은 지침서
달성십현(達城十賢) 박종우 재사(齋舍) 도곡재(陶谷齋)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9호
일시루(一是樓)라고도 불리우는 이 정자는, 항상 바르고 올곧게 살고자 하는 뜻이며, 이 집을 지은 이의 정신 세계를 엿볼 수 있다.(안평대군 글씨로 추정) 장희자 기자.

태고정(太古亭)은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638번지에 있는 보물 제554호 정자이다. 일명 일시루(一是樓)라고도 하는데, 박팽년의 유복손 박일산이 세운 아흔아홉 칸 종택에 딸린 정자로 1479년 처음 세워졌다.

묘리 마을을 들서면 주차장을 지나 우측에 사육신 기념관이 있다. 장희자 기자

박팽년(朴彭年, 1417~1456)의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본관은 순천이며 이조판서 한석당(閑碩堂) 박중림(朴仲林)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세종 16년(1434)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로 급제, 벼슬길에 나섰다.

7대손 숭고(崇古)가 1644년 별당으로 세운 충효당(忠孝堂)을 1995년 후손이 이곳으로 옮겼으며, 사육신기념관에서 100m를 지나면 우측에 있다. 장희자 기자

세종 때에는 신숙주·최항·유성원·이개·하위지·성삼문 등 당대 이름 높은 선비들과 더불어 집현전 학사로서 일세를 풍미했다. 단종 1년(1453) 우승지를 거쳐 이듬해 형조참판이 되었다. 세조 1년(1455)에는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음해에는 다시 형조참판으로 들어왔다. 이때 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김질 등과 단종복위운동을 추진하였으나 김질의 밀고로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도곡재와 담장을 맞대고 있는 앞집으로 도곡재를 관리하는 후손이 기거하는데, 과거에는 도곡재와 앞집이 같은 한집이였다고 한다. 장희자 기자

평소 그의 재주를 사랑하던 세조가 김질을 옥중으로 보내 모의사실을 숨기기만 하면 살려줄 것이라고 회유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으며, 1456년 6월 7일 그는 혹독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순절하였다. 집안 또한 참화를 입어 아버지 중림을 비롯한 동생 인년·기년·대년·연년 4형제와 아들 헌(憲)·순(珣)·분(奮) 3형제가 모두 처형되었다. 이와 함께 그의 어머니·처·제수 등도 대역부도의 가족이라 하여 공신들의 노비로 끌려가거나 관비가 되었다.

14대손 문현(文鉉)이 1778년에 건립한 뒤 그의 후손 종우(宗祐)의 재사(齋舍)로 사용하던 도곡재(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9호) 장희자 기자

온 집안이 멸문의 화를 당할 때 박팽년의 둘째 며느리 성주 이씨는 관비가 되어 친정이 가까운 대구로 내려왔다. 공교롭게도 그녀는 마침 임신 중이었던 까닭에 아들을 낳으면 죽이고 딸을 낳으면 관비로 삼으라는 어명을 받게 된다. 해산을 하니 아들이었는데, 그 무렵 딸을 낳은 여종이 이씨 부인과 상의하여 아기를 바꾸어 기르게 되어 이 아이는 목숨을 건진다.

도곡재 앞 마당에는 관리인이 정성들여 심어놓은 수많은 꽃들이 향연을 펼치면서 꽃대궐을 이루고 있다. 장희자 기자

박비(朴婢)라는 아명으로 외할아버지에 의해 비밀리에 키워진 이 아이가 16세가 되었을 때,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이모부 이극균(李克均)이 처가인 묘골에 왔다가 장성한 그를 보고 자수를 권했다. 상경하여 성종으로부터 사면을 받고 돌아온 그는 후손이 없는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아흔아홉 칸 종택을 짓고 묘골에 정착했다. 이 사람이 바로 사육신 가운데 유일하게 대를 잇게 된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朴壹珊)이다.

도곡재에서 20m 거리에 있는 육신사라 적힌 외삼문으로 뒷편은 절의묘(節義廟) 현판이 달려 있다. 장희자 기자

그리고 후손들이 절의묘(節義廟)라는 이름으로 사당을 짓고, 박팽년의 현손 계창(繼昌)이 선생의 제삿날 여섯 분 선생들이 사당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꾸었다. 놀라 다섯 분의 제물도 함께 차려 하빈사(河濱祠)라는 이름으로 사육신을 함께 배향하였다.

외삼문에서 바라보이는 중앙 홍살문과 좌측 숭정사, 우측 태고정 전경. 장희자 기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기도 했던 사당은 1974년부터 1975년 사이에 「충효위인 유적정화사업」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이름도 육신사로 바뀌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육신뿐만 아니라 박팽년의 부친 중림의 위패도 봉안하고 있는 관계로 사당에는 ‘숭정사(祠)’ 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태고정 앞쪽 담장 안에 있는 숭절당(崇節堂)으로, 숭정사의 제사에 쓰이는 제기를 보관한다. 장희자 기자

태고정()은 이 육신사 경내의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은 조선 성종 10년(1479) 에 지은 후에,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일부만 남았던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중건하였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는 건물이지만 가구나 세부가공이 정교하면서, 조선 중기 세웠던 원형을 거의 그대로 반영하여 건축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태고정 건물은 모든 부재가 반듯 반듯한 목재만을 사용하고, 군더더기가 없고 반듯하면서도 우아함을 지니고 있다. 장희자 기자

 돌 허튼층쌓기로 만든 기단위에,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 윗 기단을 만든 다음, 그 위에 자연 초석을 놓고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워 창방으로 기둥머리를 결구(結構)하였다. 정면 4칸 측면 2칸에 건평 30평으로, 동쪽 2칸은 대청마루이고 서쪽 2칸은 방으로 되어 있다.

내부 편액 한석봉의 글씨, 아래 좌측 오봉 이호민(五峯 李好閔 1553~1634)의 시, 우측 임진왜란 때 이 곳을 다녀간 명나라 관리와 그들과 동행했던 우리측 관리들의 이름이 적힌 현판. 장희자 기자

특히 지붕의 처리에서 특색이 드러난다. 대청이 있는 오른쪽은 팔작지붕, 방과 부엌이 있는 왼족은 맞배지붕인데, 여기에 부섭지붕을 달아내어 마감하였다. 그에 맞추어 팔작지붕 부분은 겹처마, 부섭지붕쪽은 홑처마를 둘렀다.

태고정을 관리하는 집과 좌측으로 나란히 있는 숭정사 내삼문(성인문). 장희자 기자

이렇게 지붕 양쪽의 마무리가 팔작과 맞배로 다른 대표적인 경우를 부석사 봉황루에서 볼 수 있고, 맞배지붕에 부섭지붕을 덧붙이는 방식은 가까운 영천·경산 지방의 고건축에서 드물지 않게 사용하는 수법이다. 일반적인 틀을 벗어난 지붕구조로 미루어 애초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었던 건물이 어느 땐가 부섭지붕을 덧대면서 지금처럼 개조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내삼문(성인문)에서 바라보이는 외삼문(節義廟)과 연못주변 전경이 고풍스럽다. 장희자 기자

태고정 앞쪽 담장 안에도 몇 채의 건물이 있다. 안채 하나와 사랑채 둘로 이루어진 숭절당(崇節堂)이다. 안채와 사랑채 하나는 1930년대에 지어졌고, 또 다른 사랑채 하나는 1981년 세워졌다. 숭정사의 제사에 쓰이는 제기를 보관하거나 임시숙소로 쓰인다.

삼가헌(국가민속문화재104호)은 11대손 박성수가 1769년 지은 살림집이며, 하엽정은 그의 손자 박규현이 지은 삼가헌의 별당채이다. 장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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