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 주왕산 산행길에서 보라색으로 피어난 투구꽃을 만났다. 길가 옆 큰 나무 그늘에서 당당하게 피어 있었다. 꽃대에 여러 가지로 뻗어서 피어 있는 보라색 꽃이 가을과 참 잘 어울렸다.
가을에는 용담, 벌개미취, 금강초롱, 물봉선, 꽃향유, 배초향, 층꽃이 앞을 다투며 보라색 꽃을 피운다. 꽃의 색깔 중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흰색, 핑크, 빨강, 노랑, 보라순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보라색 꽃이 가을에 많이 보일까? 생각해보니 아마도 자외선이 강한 가을 햇살에 보라색이 더 선명하고 곱게 빛나서일 것이다.
보라색 야생화 중에서 투구꽃은 그 치명적인 아름다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물론 산아래에서 피어나는 구절초나 쑥부쟁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가을꽃으로 투구꽃을 빼놓을 수는 없다.
투구꽃은 꽃이 투구를 닮아 그렇게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꽃 모양이 마치 로마 병정이 쓰던 투구 같다고 하는데 실제로 본적이 없으니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오래 전에 이탈리아 여행 때 남편이 기념으로 산 로마병사 인형이 뒷방에서 잠자고 있는 것을 보았다. 머리의 투구가 정말로 투구꽃과 비슷하게 생겼다.
주왕산 대전사에서 개울길을 따라 암자로 가는 숲길에서 만난 투구꽃. 꽃말은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라고 한다. 우리가 초오풀 또는 부자라고 알고 있는 식물이 바로 투구꽃이다. 강한 독성을 가지고 있어서 손으로 만지는 것은 금물이다.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투구꽃을 자세히 살펴보니 달린 모양이 흥미롭다. 아래쪽 꽃을 덮은 듯한 위쪽의 꽃이 꼬깔모양인데 그것이 투구처럼 생겼다.
여러 갈래의 가지에 촘촘하게 피어 있는 모습을 보면 마치 투구를 쓴 로마 병사들이
출전을 앞두고 열병식을 하고 있는 모습 같기도 하다.
아무튼 하늘빛 고운 가을날에 꽃을 찾아 떠난 숲길에서 투구꽃을 만나게 되어 너무 반가웠다. 개울가 물소리. 바람소리, 오가는 나그네들의 속삭임이 있는 곳에서 너무나 당당히 피어 있다.
누구든지 멋진 추억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초가을이 되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 투구꽃은 젊은 시절에 가보았던 베네치아의 추억을 소환해 주었다. 그래서인지 수많은 가을 꽃 중에서 투구꽃이 남다르게 예뻐 보였던 가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