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토요일 아침이 바쁘다. 아침밥을 챙겨 먹고 텀블러를 찾아 커피를 내리고 간식을 준비하고 간단하게 여장을 꾸려서 집을 나섰다. 한차례 버스를 갈아타고 겨우 9시에 맞추어 어린이회관 앞에 내리니 지인 두어 명이 건너편에 보인다.
단풍 시즌도 막을 내린 11월 마지막 토요일, 오미크론(Omicron) 공포 때문인지, 평소 등산객과 관광버스로 북적이던 회관 앞 도로가 조용하다.
오늘 목적지는 고령 개경포 너울길, 일행은 총무(이오산우회)를 포함해서 셋이다.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 공자님 말씀처럼 오늘 가르침이 자못 기대된다. 중부내륙을 타고 내려가는데 들판에 마시멜로같은 흰통들이 여기저기 놓여있다. 트랙터로 추수하면서 사료용 볏짚을 비닐포장해서 모아 놓은 것이다. 현풍휴게소에서 국도로 나와서 낙동강을 건너 강변로를 타고 내려와서 농어촌공사 성구양수장 부근에 주차했다.
개경포(開經浦)가 있는 개포리는 낙동강의 흐름이 완만한 물돌이 지형으로 옛날부터 수로가 발달해서 소금과 곡식 등의 교역이 발달했다. 가혜진(加兮津), 개산포(開山浦)로 불리다가 고려 때 강화도의 팔만대장경을 이곳에서 해인사로 이운(移運)하면서 개경포가 되었다. 근처 강변의 개경포공원에서 승려들이 경전을 하나씩 머리에 이고 해운사로 이운하는 기념 조형물을 볼 수 있다.
개경포 너울길은 제방 끝자락의 개호정(開湖亭)에서 시작된다. 조선 선조 때 송암(松庵) 김면(金沔, 1541∼1593) 등의 ‘낙강칠현’이 이곳에서 뱃놀이하고 시를 지으며 놀았다고 한다. 개호정에서 강기슭을 따라 부례관광지까지 가는 길(4km)을 개산잔도(開山棧道)라고 하며, 이어서 청룡산(302m)의 산악자전거길(MTB)로 개경포로 돌아오는 행로가 많이 이용되고 있다.
낙동강을 아찔하게 내려다보며 발목까지 채는 낙엽을 밟고 오르락내리락하며 한참을 가니 지촌(芝村) 박이곤(朴履坤, 1730~1788)의 ‘개산잔(開山棧)’ 시비가 나온다. 오언절귀 중 ‘양장세로다(羊腸細路多), 양의 창자처럼 꼬불꼬불한 길이 많네’ 하는 마지막 구절이 와 닿는다. 그는 낙강(洛江) 무이구곡(武夷九曲)을 지어 이곳의 경치를 예찬하기도 했다.
물이 바싹 마른 개울을 건너니 박정완(朴廷琬), 박정번(朴廷璠) 형제의 임진왜란 전적비가 나왔다. 오늘날의 기뢰처럼 물속에 나무 말뚝을 박아서 왜선을 격퇴했다고 하니, 선조들의 발상과 애국심에 절로 머리가 숙어진다. 누군가 일궈놓은 마늘밭과 귀여운 출렁다리를 지나서 벼랑길을 오르니 다리도 무겁고 시장기도 돈다. 갈림길에서 전망대 방향으로 오르막길을 한참 올라가니 주차장이 나온다.
청운각(靑雲閣) 전망대에서 낙동강 건너 멀리 보이는 비슬산과 화왕산, 남도의 마을과 들판을 조망하며 준비한 간식을 나눠 먹었다. 부례관광지에는 야영장, 바이크텔, 카라반과 어린이 놀이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전망대에서 개포리 방향의 임도로 십여 분을 걷다가 다시 마늘밭 경작지로 내려와 벼랑길로 접어들었다. 정오가 갓 지났는데 바람이 차고 오전에 따스하던 연두색 강물이 그사이에 새파랗게 질려 있다.
‘인심수심(人心水心)이라. 세태에 따라 변하는 인심을 어찌 나무랄 수 있겠는가?’
서둘러 개호정에 돌아오니 오후 1시가 조금 지났다.
오전 10시경에 출발해서 거의 3시간 동안 대략 18,000보, 11km를 걸었다.
강변로를 거슬러 박석나루, 박석진교로 낙동강을 건너다.
강원도 태백에서 구미를 거쳐 온 낙동강(洛東江)은 합천의 황강(黃江)을 안고 남강(南江)과 합수해서 김해를 지나 바다에 들어간다.
………
“ 나처럼 불우한 군인이 없기를 바랬는데….”
“친구야, 사과도 하고 추징금도 다 내고 하지….”
“잘 오이소, 늦었지예!”
………
강물 속에는 수없이 많은 강물이 흐르고 있다.
11월 27일, 전두환 전임 대통령의 장례식 마지막 날이다.
코로나19 확진자는 4,068명, 사망자는 52명이다.
귀가하는 차량들이 엉금엉금 기어서 앞산 터널로 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