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창]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인문의 창]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장기성
  • 승인 2019.02.12 16:03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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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고지신'이란 말이 사라질 판이다.

파레토의 법칙은 이라이탈리아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사진)가 발견한 현상에서 이름을 따와 이름 붙였다. 파레토는 1896년에 이탈리아 20% 인구가 80% 땅을 소유한다는 현상에 대해 논문으로 발표했다.위키백과
파레토의 법칙은 이라이탈리아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사진)가 발견한 현상에서 이름을 따와 이름 붙였다. 파레토는 1896년에 이탈리아 20% 인구가 80% 땅을 소유한다는 현상에 대해 논문으로 발표했다.위키백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소설의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언뜻 떠오르는 생각은 파레토의 법칙이다. 파레토의 법칙이란 상위 20% 사람들이 전체 부(富)의 80%를 가지고 있다거나, 상위 20% 백화점 고객이 매출의 80%를 창출한다든가 하는 뜻으로 쓰이지만, 반드시 80과 20이란 숫자 자체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전체 성과물의 대부분이 소수의 사람에 의해서 창출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의 법칙에서 밝혀내고자 하는 것은 소득의 불평등과 소득의 독과점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미국에서는 월마트 소유주 집안의 재산이 하위 1억3천만 명의 재산을 합친 것보다 많다고 한다.

이탈리아 경제학자인 파레토는 어느 날 개미를 관찰하던 중, 열심히 일하는 개미는 그 중 20퍼센트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신기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열심히 일하는 개미들만 따로 모아서 일을 시켰더니, 그 중에서도 20퍼센트 정도만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의 법칙에서 밝혀내고자 하는 것은 소득이나 소비의 불평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통계청의 최근발표를 보면 일하는 젊은이들이 노년층을 부양해야하는 부담은 갈수록 버거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생산가능 인구 100명이 부양해야할 고령자는 2015년 기준으로 17.5명이다. 하지만 10년 후인 2025년에는 29.4명으로 늘어나고, 2035년에는 47.9명이 된다는 것이다. 50년 후인 2065년이 되면 88.6명의 고령층을 먹여 살리는 부담을 지게 된다는 것이다. 통계상으론 얼추 파레토 법칙에 근접한 것 같기도 하다. .

지식정보화시대에 노인의 80%는 젊은 세대 20퍼센트에 의존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제목으로 처음에는 언뜻 공감이 갔다. 하지만 노인들을 대놓고 폄하 하는 듯한 제목이라 망측스럽고 섬뜩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노인에 대한 사회적 부담이 오죽했으면 소설을 영화로까지 만들었을까하고, 괜히 측은지심이 발동되어 노인들에게 민망하고 죄스런 생각마저 든다. 누가 지금 우리나라의 부(富)를 이 궤도까지 올려놓았는지 하면서 말이다.

어떤 설문조사 결과 ‘100세 시대 도래가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전체 응답자의 32.4%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 이유로는 △자식들에게 부담이 될 것 같아서(35.4%) △질병으로 고통스러운 삶이 싫어서(21.9%) △노년기가 너무 길어서(18.0%) 등의 순이었다. 고민거리는 △건강(58.6%) △생활비(30.4%)가 가장 많았으며 70.2%는 노후 준비가 안 돼 있다고 응답했다. 이처럼 노인들 스스로도 사회적 부담에 대해서 무척 고통스러워하고 있음을 통계는 보여주고 있다.

그렇더라도, 다른 한편으론 노인을 국가의 짐으로 쉽게 단정 짓고, 당돌하게 이런 압축된 표현으로 제목을 뽑았다는 점에서, 가히 카피(copy)의 귀재다움이 따로 없구나하고 탄식도 해본다. 이 소설의 원제가 ‘No country for old men’로 되어있으니, 우리말로 정확히 1:1로 번역된 셈이다. 2007년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10대 영화중에서 1위를 차지했다니 주제와 줄거리가 몹시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영화 'No country for old men'의 영화 포스터이다. 위키백과
영화 'No country for old men'의 영화 포스터이다. 위키백과

온고제목이 주는 선입견과는 사뭇 다른 내용이다. 순간, 그럼 그렇지 하고 잠시 안도해본다.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 노인은 거칠고 미친 세상에서도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며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 싸우는 나이든 경찰관이다.

그러나 현실사회의 범죄는 노인이 애써 축적해 놓은 수사기법이나 경륜이 별 소용이 없다는 데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최근에 발생하는 거의 모든 지능범죄의 수법을, 종래의 전통과 경륜에 의해 축적된 수사기법의 방향이 아니라, 전혀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방향에서 실마리를 풀어나간다. 따라서 나이든 경찰관의 역할이나 연륜이 범인검거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음을 냉소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옛날의 수사경륜과 지금 현실사회에서 벌어지는 범죄수법 사이의 괴리를 예리하게 대비시키면서, 신종범죄는 젊은 감각을 지닌 경찰이 아니고는 접근하기 쉽지 않음을 은연중 암시하고 있다.

결국 연륜과 지혜로 무장한 노인 경찰은 범죄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떤 영향력도, 의미 있는 결과도 내놓지 못하고, 허무하게 지쳐갈 수밖에 없음을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역설적으로 노인의 연륜과 지혜가 오히려 수사에 방해자나 훼방꾼으로 작용함을 자조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폭력과 살인이 매 순간 반복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는 노인의 경륜이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없음을 비아냥거리며, 결국에는 경륜이 패배할 수밖에 없음을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원래 영화나 소설이 가공세계인 픽션에서 출발한다지만, 세대와 세대 간의 전승이 별반 교훈적이거나 유용한 점이 없다는 현실을 사실적이면서도 실체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신선함을 불러일으킨다.

이 영화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과거의 지혜로움이 미래 세대에게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예단한 셈이다. 점차 노동집약적인 산업에서 전문성이 중시되는 지식기반산업으로 넘어가게 되면서 전문성이 중요해지고 있는데, 변화하는 지식을 따라잡지 못하면 결국 경험과 경륜은 아무 쓸모없는 구닥다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소 과도한 선입견과 편협성이 내포된 시각임을 전제로 하더라도, 하루가 멀다 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미래사회의 모습을 예리하게 예측함으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경륜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교훈적인 처방을 보여주려는 시도로도 보인다.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는 논어의 위정(爲政)에서의 주장이 흔들릴 판이다. 온고지신의 허망함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으니, ‘노인은 노인일 뿐이다.’ 라고 한 말과 맥이 닿아있어 안타깝기 짝이 없다.

‘노인의 지혜는 돈을 주고도 절대 살 수 없는 귀한 가치다.’라는 말이 조만간 사전에서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니, 노인의 설 자리는 더욱 위태롭고 좁아질 것 같다. ‘노인의 지혜는 공짜로 줘도 아무도 사지 않는다.’는 말이 국어사전에 새롭게 등재될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는 그냥 영화일 뿐이길 바라지만.

오늘따라, 박노해의 ‘오래된 것은 다 아름답다’란 시가 오히려 포근하게 다가온다.

자기 시대의 풍상을 온몸에 새기며,

옳은 길을 오래오래 걸어가는 사람

숱한 시련과 고군분투를 통해

걷다가 쓰러져 새로운 꿈이 되는 사람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그러니, 이 영화의 제목을 욕심 같아서는 ‘지혜로운 노인을 알아주는 나라는 없다’로 수정해야 제대로 된 제목이 될 것 같기도 한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