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한 바퀴, 자연과 사람이 그림이 되는 병산서원(3)
안동 한 바퀴, 자연과 사람이 그림이 되는 병산서원(3)
  • 박미정 기자
  • 승인 2024.06.05 08: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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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서원건축의 백미, 병산서원
입교당에 앉으면 마음마저 고요해진다. 박미정 기자
입교당에 앉으면 마음마저 고요해진다. 박미정 기자

 

병산서원(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길 386)의 역사는 1572년 서애 류성룡 선생이 이곳으로 서당을 옮겨오면서 시작되었다. 수많은 인재를 양성했던 서당은 1614년 류성룡 선생의 위폐를 모시면서 서원으로 바뀌었다. 1863년 병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은 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손되지 않고 남아 지금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류성룡 선생과 셋째 아들인 류진 선생을 모시고 있으며 세계유산에 한국의 서원으로 등재되어 있다.

병산서원 정원의 고목이 푸르름을 더한다. 박미정 기자
병산서원 정원의 고목이 푸르름을 더한다. 박미정 기자

 

병산서원 건물의 배치와 구성은 조선시대 서원건축의 전형을 가장 잘 보여 주고 있어 오늘날 서원건축의 백미로 꼽히고 있다. 또한 낙동강이 휘돌아 흐르는 곳에 자리한 병산서원은 완만한 화산을 등지고 앞에는 병산이 펼쳐져 있어 자연경관이 매우 뛰어나다. 특히 배롱나무 꽃이 피어나는 여름이면 더욱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다. 

입교당 뒤뜰에서 만난 태극문양이 눈길을 끈다. 박미정 기자
입교당 뒤뜰에서 만난 태극문양이 눈길을 끈다. 박미정 기자

 

병산서원은 선현을 모시고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일 뿐 아니라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영남 지역 유림의 뜻을 모아 공론을 이끄는 중심역할을 해왔다. 1611년 문묘에서 퇴계 이황 선생의 위폐를 모시지 말아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류성룡 선생의 문인이었던 김봉조와 김윤안이 병산서원을 중심으로 이를 반대하는 소를 올려 막을 수 있었으며 1792년에는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해야 한다는 추존소도 당시 병산서원의 원장이었던 이우가 앞장서 올렸다. 번암 채제공의 유교책판을 봉정사에서 간해할 수 있게 된 것도 바로 병산서원에서 주도하여 이루어졌다.

병산서원 계단길 풍경이 멋스럽다. 박미정 기자
병산서원 계단길 풍경이 멋스럽다. 박미정 기자

 

또한 병산서원에 있는 건물과 현판에는 '수양'의 의미가 담겨있다. 이곳의 정문인 복례문은 '자신을 극복해 예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복례문 앞에서 자세를 낮추면 만대류, 병산서원 입교당 현판이 차례로 한눈에 들어온다. 솟을대문을 지나 들어서면 병산서원의 대표건축물인 만대루가 시선을 압도한다. 유생들이 심신을 수양하는 휴식처이자 강학을 위한 공간이다. 만대루에 오르면 노송과 백사장, 낙동강 너머 병산까지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어디서든 방문객들이 앉으면 포포존이 된다. 박미정 기자
어디서든 방문객이 앉으면 포토존이 된다. 박미정 기자

 

마당에 들어서면 양쪽에 유생들의 기숙사인 정허재와 동직재가 자리하고 있다. '마음을 비우면 고요해지고 행동이 곧아진다'는 뜻이다. 정면에 위치한 입교당은 유생들이 학문을 배우는 강당이다. 입교당 동쪽에 있는 명성재는 원장이 머무는 공간으로 '자연처럼 쉼 없이 성실하면 밝아진다'는 의미를, 서쪽의 경의재는 교수들이 머무는 공간으로 '경을 실천하면 안으로 곧아지고 의를 실천하면 밖으로 바르게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자에 매달린 소북도 풍경이다. 박미정 기자
정자에 매달린 소북도 풍경이다. 박미정 기자

 

1978년 3월31일에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었으며 서애 선생의 문집을 비롯하여 각종 문헌 1,000여 종 3,000여 책이 소장되어 있다.

병산서원에서 바라본 풍경. 박미정 기자
병산서원에서 바라본 풍경. 박미정 기자

 

병산서원! 입교당 뒷마당으로 향하는 문 하나하나가 액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 계절의 변화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틀, 하루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액자이다. 입교당에 앉아서 만대루 건너 병산을 보니 더할나위 없이 마음이 평온해 진다. 

병산서원 뜰안에 매실이 오종종 열렸다. 박미정 기자
병산서원 뜰안에 매실이 오종종 열렸다. 박미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