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워서 남주는 일의 즐거움, 류부열 씨
배워서 남주는 일의 즐거움, 류부열 씨
  • 강지윤 기자
  • 승인 2020.08.24 1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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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배우면서 즐겁고 그걸 남들에게 전해 도움이 된다면
그게 제일 의미있는 삶이지요"
배워서 남주는 류부열선생님  웃음이 소년처럼 해맑다.  강지윤기자.
배워서 남주는 류부열 씨 웃음이 소년처럼 해맑다. 강지윤기자

“오늘 내가 배우면서 즐겁고 그걸 남들에게 전해 도움이 된다면 그게 제일 의미있는 삶이지요.”

정년퇴직을 앞두고 교장으로 재직하던 마지막 근무지에서 그는 결심했다. 사이버대학에 학사편입하기로. 그의 원래 전공은 지구과학이었다. 평생을 지구과학 교사로 교단에 섰고 정년을 2년 여 앞두고 ‘한국어교원’ 자격을 따기 위해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학생과 교장선생님 두 개의 역할을 2년간 했다. 그리고 한국사이버대학 한국어학과에서 한국어교원 자격을 따서 퇴직후 베트남 세종학당의 교사가 되었다. 베트남에서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1년간 가르치다 돌아왔다. 그의 이름은 류부열(65) 전 교장선생님이다.

류 씨가 베트남으로 가게 된 계기는 이렇다. 어느날 근무 중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다른 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동기였다. 자신의 학교에 베트남 학생이 있는데 집이 너무 멀어 류 교장 학교로 전학을 받아 주면 안 되겠느냐는 얘기였다. 학부모와 함께 학교에 와서 면담을 하자고 했더니 다음날 아버지와 함께 왔다. 어머니는 한국말을 잘 모른다고 했다. 재혼 가정이었다. 베트남인 어머니가 남편이 죽자 한국으로 재혼하러 오며 함께 데리고 온 베트남 출생 맏딸이었다. 한국 나이로는 중학교 입학할 나이였지만 한국어를 몰라 초등학교에 2년간 다녀서 한국말을 잘 했다. 집안 형편상 하교 후 어린 동생을 돌보아야 해서 집이 가까운 학교로 전학을 하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아이를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절차를 밟아 전학을 허락했다. 그 일로 류 씨는 다문화가정에 관심을 갖게 되어 교원 연수도 받게되었고, 그 연수로 인해 베트남으로 가게 되는 일로 이어졌다.

퇴직 후 오랜만의 휴식과 여행으로 재충전한 후, 호치민 인근의 빈정성으로 건너갔다. 세종학당에서 한글교사가 되기 위해서였다. 호치민에서 40km 정도 떨어진 곳이지만 오토바이가 많은 현지에서는 호치민까지 1시간 정도가 걸린다. 인근에 한국기업들이 많이 들어와 있어서 한국말을 배워 한국기업에 취직하고 싶어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현지 기업보다 보수가 좋으며, 한국문화에 대한 선망과 호기심, 박항서 축구감독에 대한 열광도 한몫 했다. 대개 20, 30대인 학생들은 밝고 활력이 있었다. 베트남전 후에 태어난 세대들로 우리나라 경제가 일어서던 1970년대를 연상케 했다. 주말에 마트에 가면 젊은 부부들이 아이들을 데려와 엄청나게 붐볐다. 미래에 대해 밝고 희망적으로 보였다. 역사적으로도 한국과 닮은 점이 많았다. 유교문화가 은연 중에 배어 있어 생활력이 강한 여자들이 가정경제에 많은 몫을 하고 있어도 남자들을 존중하는 경향도 엿보였다.

하루는 10월 한글날을 맞아 숙제를 냈다. 한국어 말하기 대회를 위해 원고를 써오라고. 입상자는 한국으로 가는 일주일간의 여행이 부상이었다. 한 학생의 원고를 보는 순간 가슴이 덜컥했다. 원고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마을의 비석에는 이렇게 써 있다. '전쟁 중에 한국의 군인들이 양민을 학살했다.'  개인도 그렇지만 국가간의 일에서도 지나간 시절의 과오나 잘못된 일은 충분히 사과하고 더 진실된 마음으로 상대를 대할 때 과거에서 벗어나 더 나은 이웃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1년 여 베트남에 있는 동안 한국어를 가르치고 한국을 알리는 일에 깊은 책임감을 느꼈다. 현지의 젊은이들과 우정도 쌓아 나갔다. 어느 날 한국에서 연락이 왔다. 모시고 있던 장모님이 96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함께 생활하면서 느껴 본 장모님의 모습이 딱하게 느껴졌다. TV를 봐도 잘 알아 듣지도 못하는 것 같았고 머리가 맑지 않으니 했던 말을 여러번 하거나... 이렇게 노인을 모시게 되니 다른 분들에게도 관심이 갔다. 어떤 분은 아프다가 말 한마디 못하고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오랫동안 의식없이 연명치료로 생명을 연장하기만 하는 분도 있었다. 자연히 생의 마지막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인간다운 죽음이란 어떤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때 웰 다잉(Well Dying) 강의가 눈에 들어왔다. 지역 다사랑 복합문화공간에서 하는 강의였다.

생의 마지막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 노후의 경제적 자립, 인적네트워크 관리, 고독사를 방지하기 위한 방법, 자기 삶에 대한 회고, 마음의 빚이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까, 내가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정리, 연명치료에 대한 계획, 유품정리, 유언정리, 법적으로 인정받는 유언장 쓰기 등 다양한 강의를 듣고 수강생들은 서로의 경험과 느낌을 나누면서 죽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었다.

웰 다잉 강의야말로 인생에 대한 총체적 정리의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해진 과정이 끝나고 나서도 수강생들은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각자 파트를 나누어 공부하고 매주 한 번씩 만나 자기에게 부여된 과목을 더 깊이 있게 공부하고 토의하며 강의 요청이 오면 외부 강의도 하고 있다.

짬짬이 지역 도서관이나 문화센터 등에서 하는 새로운 강의도 꾸준히 살펴보며 강의도 듣는다. 사진, 낭독극, 배드민턴 등... 가보지 않은 길을 하나씩 돌아 볼 때마다 자신의 삶이 풍성해지고 매 시간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내가 하는 일을 통해 다른 사람이 앞날을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되고 보탬이 된다면 그게 제일 큰 보람이지요. 그럴려고 숨어 있는 자기 능력도 개발하게 되는 것이지요.”

예순다섯의 현직 자기개발러가 환하게 웃는다. 소년 같은 웃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