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국가산업단지 조성의 산 증인 이헌영 고문①
구미국가산업단지 조성의 산 증인 이헌영 고문①
  • 강효금 기자
  • 승인 2024.04.21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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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영 고문은 구미국가산업단지 조성의 산 증인이자 역사다. 이원선 기자
이헌영 고문은 구미국가산업단지 조성의 산 증인이자 역사다. 이원선 기자

담수회 이헌영(94) 고문은 구미국가산업단지 조성의 산 증인이다. 구미국가산업단지는 1970년대 섬유와 전자산업을 시작으로 지금의 반도체· 방위산업에 이르기까지 국가 경제 발전과 산업화의 중추적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며, 내륙지방 최대 규모(총 5개 국가산단, 전체 면적 2,963만㎡)의 산업단지로 성장해 왔다. 그 조성의 시발이라 할 수 있는 구미1공단은 섬유업종을 중심으로 하는 일반단지와 전자업종을 중심으로 하는 전자단지로 이루어졌다. 이 고문은 그 섬유단지 조성의 일등공신이다.

◆ 예안 이씨 종가의 3남

안동시 풍산읍 우렁골에 예안 이씨 집성촌이 있다. 조상들은 500년 전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300~400 가구가 모여 살던 여기에서, 그는 충효당 종가의 3남으로 태어났다. 큰형님은 해방 이듬해 1946년 스물네 살의 나이에 갓 돌을 지난 아들 하나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홀로 된 형수는 아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떠나고, 병약한 둘째 형님을 대신해서 3남인 그가 집안을 책임져야 했다.

일제시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잘살아 다시 집안을 일으키겠다’고 다짐하며 힘든 환경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다. 고향에서 6·25 전쟁을 맞았다. 전쟁은 그를 군대로 이끌었고, 입대해서 7년간 군 생활을 했다. 그동안 아버지 혼자 종가를 지켰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몫은 그에게 넘겨졌고, 줄곧 종손의 대리 역할을 하며 종가를 관리했다. 종택은 1970년대에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수를 거쳐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 구미국가산업단지의 살아있는 역사

대구에서 전기 관련 업무를 맡아보던 중에 구미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워낙 성실하게 일한다는 주위 소문으로, 차출되어 구미로 향했다. 경북직물조합에서 구미국가산업단지에 신설하는 직물협업단지 조성의 책임을 맡은 것이다.

직물협업단지는 총 33개 업체를 모집했다. 10만 평에 달하는 용지를 매입하고 입주업체의 돈을 거두는 일이 고스란히 그의 몫이었다. 용지매입부터 난관의 연속이었다. 하천, 과수원, 선산, 마을 부락, 공동묘지 등 다양한 형태의 토지를 사들여야 했다. 경북 선산군과 협조해서 몇 년에 걸쳐 터를 정리했다. 대구 공장을 폐쇄하고 이전하는 데에는 더 많은 문제가 있었다. 입주 업체 대부분이 중소기업이라 정부의 도움이 절실했다. 취득세와 등록세 면제, 3년간 소득세 전액 면제, 2년간 50% 감면. 거기에 더해 융자를 알선하며 입주 기업을 도왔다. 직물공장에서 개별적으로 돈을 거두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대구에서 사업을 하는 기업들은 구미공단에는 신경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혼자 뛰어다니며 융자를 받고 용지 관련 일을 매듭짓고 공장을 옮겼다.

새마을 운동은 그에게 각성의 기회가 되었다. 그 후 30년 동안 그는 새마을 정신을 전파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이원선 기자
새마을 운동은 그에게 각성의 기회가 되었다. 그 후 30년 동안 그는 새마을 정신을 전파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이원선 기자

◆ 새마을 운동과 새 교육, 새 정신

1970년 새마을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로써 생각할 수 없는 운동이라 생각되었다. 자진해서 새마을연수원에 입소해서 교육받았다. 지역사회개발운동이자 사회혁신운동인 이 운동은 그의 내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그가 사는 곳에서 직접 이 운동을, 이 정신을 실천하고 싶었다. 받은 봉투를 뒤집어서 다시 재활용하고, 모든 면에서 근검절약하며 앞장섰다. 가난한 시기이기도 했지만 “잘살아 보자!”는 그 슬로건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즈음, 마침내 구미공단에도 25개 업체가 들어서고 4천 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 4천 명의 종업원을 대상으로 새마을 교육을 실시했다. 돈 한 푼 받지 않고 무료로 하는 정신교육이었다. 그가 실천한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린 여공들이 모여 있으니 당연히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다. 심지어 근처에 사는 주민들 가운데에는 딸을 절대 공장에 보내지 않겠다고 공공연히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공단의 분위기를 바꿀 필요가 있었다. 그는 구미경찰서 보안과장과 협의해서 공장마다 새마을 교육을 실시했다. “왜 이렇게 공장에서 고생하고 있는가?”부터 열심히 저축해서 이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자는 것까지, 새 희망을 불어넣으며 어린 친구들을 격려했다. 그렇게 교육받은 아이들이 수만 명이었다. 구미시의 협조를 구해서 단속 사례와 날짜, 장소 등을 시골에 있는 부모들에게 보내 부모님들이 안심하고 아이들을 구미공단에 보낼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했다.

구미공단에는 어린 여공이 많았다. 가난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어린 동생들을 위해 돈벌이에 나선 어린 가장들은 배움에 늘 목말라했다. 그 소녀들을 위해 대기업들이 국가의 지원으로 여러 군데 야간고등학교를 개설하도록 노력했다.

새마을 운동을 30년 가까이 실천하며 봉사활동을 계속했다. 자연보호운동 회장도 역임하고, 바르게살기운동 사무국장으로 20년 동안 봉사하기도 했다.

직물협회 상무로 있으면서 구미시 동사무소와 협력하여 “윤리·도덕교육”을 열었다. ‘법대로, 사람답게 사는 법’을 초등학생을 상대로 강의했다. 40여 년간 대구에서 출퇴근하면서도 어린아이들에게 유림으로서 ‘유학의 의미’을 일깨우고 가르쳤다. 초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사자소학’과 직접 만든 ‘오자구절(五字句節)’ 교재를 가지고 방학 때면 한 달 동안 매일 동사무소 회의실을 빌려 가르쳤다. 처음에는 동장이 집마다 모집 공지를 띄웠는데 소문이 나며 한꺼번에 100여 명씩 아이들이 몰려왔다. 그렇게 오전, 오후 나누어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며 강의했다. 학부모 단체에서는 찬조금을 거두어 간식을 마련하여 그의 봉사에 감사했다.  <계속>